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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은폐기도(사설)

입력
1990.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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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사태 때 남편 김오랑 중령을 잃은 미망인 백영옥 여사가 배상소송을 내려다 실패한 사건은 5공청산의 가닥 하나가 풀릴 기회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제5공화국을 탄생시킨 불법성의 전말 일부가 법정에서 심판을 받을 뻔하다가 그대로 미궁에 남게 됐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김 중령의 희생은 12·12의 성격을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79년 12월12일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정병주 장군의 비서실장이었던 김 중령은 전두환 소장 등의 거병계획에 반대하는 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사령관실로 들이닥친 전 소장 지지의 제3공수여단 병력 등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순직했다.남편의 비극적인 군인으로서의 최후에 충격을 받은 미망인 백씨는 실명을 한 채 불우이웃을 돕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살아오다가,12·12사태에 대한 손해배상시효 10년이 완성되는 90년 12월 소송을 내려 했던 것이다. 백씨는 변호인을 통해 12·12주역인 전두환·노태우 등 전 현직 두 대통령과 당시의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이학봉 대공처장,최세창 특전사 3공수여단장 등을 상대로 10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키로 했었다. 그러나 소송제기 소식이 보도되자 전화로 협박이 오기 시작하고 각 기관의 관계자가 회유에 나서는가 하면 남편의 옛부하까지 동원해 소송을 수행치 못하게 했다는 것이 백씨의 주장이다. 백씨는 끝내 강제입원돼 변호인과 만날 길조차 막힌 채 소송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됐었다고 폭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기관이 백씨의 소송제기를 방해했는지를 현재로선 소상하게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상황과 그 동안 우리 사회에 있었던 경험칙으로 미루어 생각할 때 권력기관이 관계돼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또 그 기관을 움직인 배후에는 12·12의 적나라한 실상이 부분이나마 드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세력의 영향력 행사가 있었을 것임을 추론하는 데 어렵지 않다.

철권통치시대라면 상황논리상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힘의 남용,권력의 횡포가 백주에 날뛰고 헌법에 명시된 공정하게 재판받을 권리가 침해당할 수 없는 시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백씨사건의 진상이 공식적인 조사를 통해 명백히 밝혀지고 문책이 필요한 사건임을 분명히해둔다.

우리는 백씨사건을 계기로 하여 5공정권의 탄생,광주사태 등에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지고 정리,평가되지 않은 채 역사의 뒷장으로 넘어가고 있는 사태를 매우 우려한다. 뿐만 아니라 언론통폐합 등 5공비리에 관련된 사건들의 진상도 오리무중에 빠져 있으며,이로 인해 발생한 피해당사자들의 피해구제가 막막한 점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역사의 진실은 언제인가 어느 형태로든 밝혀지게 돼 있다. 해방 이후의 한국역사도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과거의 잘못을 감추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내놓고 흑백을 가릴 자세와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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