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마침 공석이 된 대법원 수석판사(대법원장)에 얼·워렌판사를 지명했다. 그러나 얼마를 못가 대통령은 취임초의 이 인사를 후회하게 된다. 그는 워렌의 지명을 『내가 저지른 가장 크고,어리석은 실수』였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중도파 법관이라 믿고 지명했던 새 대법원장이,인종차별 철폐 등 「평등주의혁명」이라고까지 불리는 일련의 진보적인 판결을 주도했으니,보수주의자 아이젠하워의 속이 쓰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이 속쓰림을 아이젠하워의 부통령 닉슨이 공감했을 것은 물론이다. 변호사 출신인 그가 대법원 판사 인선의 중요성을 군인 대통령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도 틀림이 없다.
그는 69년 대통령선거에서 대법원의 인사개편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재임중 공석이 나면 보수적인 법관을 임명해서,사법부의 진보적인 흐름사법적극주의를 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워렌 대법원장은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의 대항수단은 그 스스로의 사표였다. 닉슨이 취임하기 전에 민주당의 존슨 대통령으로 하여금 진보적 성향의 젊은 대법원장을 임명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이 지명한 에이브·포타스 판사는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라는 이유로 해서 상원인준을 받는데 실패했다.
이렇게 해서,닉슨은 전임자로부터 물려 받은 대법원장의 사표를 수리하고,보수적인 워렌·버거 판사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할 수가 있었다. 그는 또 대법원 판사들의 행적을 조사시켜,흠이 잡힌 포타스 판사를 몰아내고,공화당의 제럴드·포드 하원 원내총무를 시켜 다른 진보파 대법원 판사의 탄핵을 요구케 했다. 이때의 탄핵문제는 흐지부지 됐지만,닉슨은 재임중 9명의 대법관중 4명을 보수파 판사로 교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사건에 휘말린 닉슨은,「닉슨 4인방」이라고 불렸던 자기편 판사가 있는 대법원에서 패소함으로써 대통령직을 물러나는 궁지에 몰리고 만다.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의 지명권을 가진 대통령으로서는,사법독립이란 것이 좀 맹랑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미국 대법원은 정치 소용돌이의 한 초점같다. 대통령은 자기의 철학을 시책으로 펼뿐 아니라,그 철학이 사법부를 통하여 영속적인 것이 되기를 바란다. 레이건이 체현했던 미국의 보수화 경향도,「닉슨 4인방」이래로,레이건이 지명한 윌리엄·렌퀴스트 현 대법원장 등 보수파가 대법원의 대세를 차지함으로써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종신임기를 보장 받고 있는 대법원 판사들의 영향은 최장 8년인 대통령의 임기를 넘어서까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기 때문이다.
이점은,30년대 루스벨트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 판사가 75년까지 남아 있어서,워렌 대법원에 진보적 색채를 더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다. 루스벨트 자신은 취임 초기 뉴딜정책에 대한 대법원의 여러차례 위헌판결로 곤욕을 치른 대통령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그는 대법원 판사의 증원을 가능케 하는 대법원 개편안을 의회에 제출했다가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4기 연임중 2명을 제외한 대법원 판사 전원을 교체·지명할 기회를 누렸다. 그 결과가 대법원에 진보적인 성향을 가져 왔고 그 영향이 70년대 닉슨시대까지 뻗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대법원 인사는 대통령의 중요한 정치 프로그램으로 되고,여야 공방의 대상이 된다. 그 초점은 지명받은 법관의 판결경향,다시 말하면 이념법철학에 모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후보들은 흔히 대법원 인사를 선거공약으로 내건다. 포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첫 대법원 여판사의 지명을 공약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점찍었던 여판사는 지금의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 칼라·힐스 여사였다고 한다. 레이건 대통령 역시 대법원 여판사를 공약했고,그 공약대로 오코너 여판사를 지명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미국 대법원은 「레이건법정」이라 불릴만큼 보수화했다. 이 영향이,정권의 향방과 관계없이,2000년대에까지 미칠 것은 틀림이 없다. 정치 소용돌이의 한 초점이면서 사법독립을 유지해온 미국 대법원 제도의 묘미가 이런데도 있을 것 같다.
우리 대법원은 적어도 그 모양새가 미국 대법원을 많이 닮고 있다. 대법원장 임명절차도 그런 것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법원장 인사는 그리 큰 뉴스가 되지 않는다. 이번 새 대법원장의 지명·인준·취임이 모두 몇단 기사에 불과하다. 인선에 관한 심각한 토론도 없다. 그러면서 사법독립의 모든 것이 그 한 사람에게만 달린 듯이 말들을 한다.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사법부 수장의 교대는 획기적인 일이다. 미국의 종신 대법원장과는 다르겠지만,새 대법원장이 우리 사법부를 이끌 앞으로 6년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더욱 그러하다. 그의 임기는 그를 지명한 대통령의 임기를 지나,다음 대통령의 임기중반까지 이른다. 이 기간중 현임 대법관 전원의 임기가 만료되며 그는 후임 대법관의 임명을 제청하게 된다. 대법원을 거의 재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내년에는 그가 법관 4백60명을 심사,재임명하게 된다. 사법부 인사의 새로운 모습을 그에게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또 지금 진행중인 2000년대 사법개혁 작업의 뼈대도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져 나올 것이고,93년도 대법원의 서초동 이전과,95년 우리나라 근대사법제도 1백주년이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 또한 크다. 그야말로 새 대법원장은,우리나라 근대사법의 제2세기를 여는 새 수장인 것이다. 그에 대한 여망이 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그제(20일) 있은 김덕주 새 대법원장의 취임기사를 눈여겨 읽게된다. 지금은 좀 홀대를 받은 듯한 기사 크기지만,이 다음 대법원장의 교대는 신문의 1면 머리를 장식할 수도 있는,그런 업적이 새 대법원장의 6년 임기중에 이루어졌으면 한다.<상임고문·논설위원>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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