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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바르드나제는 누구인가(뉴스메이커)

입력
1990.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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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종식 막후조정… 「신사고외교」대명사/페레스트로이카시대 연 고르바초프 오른팔/최근 총리기용설… 「내치실패 희생양」분석도예두아르트·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62)은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 소련 외교의 뼈대를 이룬 소위 「신사고외교」의 대명사이다.

최근 모스크바에서 있은 한소 외무장관회담 이후 우리에게 한층 친숙해진 인물인 셰바르드나제 장관은 당시 6·25와 KAL기 격추사건에 대해 『가슴아프게 생각한다』는 사과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었다.

미하일·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오른팔로 동서간의 냉전종식에 막후역할을 담당했던 셰바르드나제장관은 스탈린의 출신지인 그루지야공화국의 마마티 소읍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련내의 유태인」으로 불리우는 그루지야인들은 뛰어난 상술로 소련의 각 공화국들 가운데서도 높은 수준의 생활을 유지해왔으나 83년부터는 공화국내 소수민족간의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셰바르드나제 장관은 89년 4월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에서 발생한 유혈시위를 거중조정하기 위한 「소방관」으로 그루지야에 급파되기도 했었으며 당시 군의 유혈 시위진압을 맹비난해 보수파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학창시절 역사학을 전공한 셰바르드나제는 20세때 공산당원이 됐으며 그로부터 9년뒤 그루지야 공산청년동맹의 위원장을 맡았다.

72년부터 13년간 그루지야공산당의 제1서기를 지내던 셰바르드나제는 「그루지야 마피아」로 불리던 공화국의 부패한 관료체제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을 단행한 장본인.

고르바초프는 85년 집권 직후 안드레이·그로미코의 후임으로 셰바르드나제를 전격 발탁,당시 57세이던 셰바르드나제는 당내 서열상 「신세대」에 속했기 때문에 그의 기용은 국내외에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셰바르드나제 자신마저도 「생애 최대의 충격」이라고 술회했을 정도였다.

백발에 늘 온화한 미소가 인상적인 셰바르드나제는 그후 미국과의 냉전체제를 청산하고 중국과의 적대관계를 종식시키는데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85년 11월의 레이건­고르바초프회담에 이은 88년 6월의 중거리핵무기감축협상(INF) 체결 그리고 89년 봄에 있은 중소 정상회담 등이 그의 숨은 솜씨였다.

셰바르드나제는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지역에도 신사고 외교를 뿌리내리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왔으며 지난 9월에는 평양을 방문한데 이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연설을 통해 아시아에서도 전유럽안보협력회의(CSCE) 방식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자는 제의를 내놓았다.

셰바르드나제 장관은 부인 나눌리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는데 딸은 텔레비전 방송국의 기자이며 아들은 과학자로 일하고 있다.

꿀벌 기르기와 포도밭 가꾸기를 취미로 삼고 있다는 셰바르드나제 장관은 청년시절 사랑에 관한 시를 쓰기도 했으나 「부끄러워서」 아직까지 출판을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얼마전까지도 부통령이나 총리기용설이 나돌던 셰바르드나제의 사임발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보혁대결에서 개혁파의 입지강화를 노린 고르바초프와의 합작품이 아니냐는 음모설도 무시할 수 만은 없다.

하지만 「외치」에 성공한 셰바르드나제가 결국 「내치」의 실패에 따른 희생양이 되고 만다면 그것은 우리로서도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이상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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