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통합” CSCE로 본격 출범/“통독일탈방지” 정경동맹 강조/「전쟁없는 유럽」 파리헌장 채택/동·서 「빈부장벽」에 막힌 통합행보… 묘책없어 고심유럽의 정치사에 있어서 90년의 주제는 「동구」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서구의 안정을 위해서는 동구의 신생 민주국가들이 안고 있는 경제적 현안해결이 그만큼 절실했던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11월말 파리에서 열렸던 전유럽안보협력회의(CSCE)는 89년 여름부터 시작된 동구사태에 대한 범유럽차원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였다.
CSCE는 과거 소련의 형제국이었던 동구국가들의 민주개혁으로 인해 자국 안보의 제1선이 무너지고 있음을 간파한 미하일·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새로운 유럽질서의 건설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구체화됐었다. 이번의 CSCE는 「유럽공동의 집」을 만들기 위한 기공식이었던 셈이다.
오래전부터 「유럽주의자」였던 프랑수아·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동구변혁으로 가속도가 붙은 「역사의 공」을 재빨리 포착했다.
미테랑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금년초 프랑스 언론들은 「유럽일가」를 강조한 그의 신년사를 대서특필했다.
『나는 헬싱키협정에서 출발한 (유럽)공동의 항구적 평화·교역·안보조직에 「유럽국가연합」이 탄생할 것을 확신한다』
고르바초프의 CSCE 개최제의에 즉각적인 회답을 보낸 미테랑은 원래부터 프랑스가 「유럽의 중원」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베를린이나 빈 등을 따돌리고 파리를 이 세기적인 사건의 개최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번 CSCE에 참석했던 각국 정상들은 동서대결의 종식에서 제일먼저 「평화배당금」을 받은 독일을 찬양했다. 헬무트·콜 독일 총리는 이에 대해 독일이 범세계적 비극의 진앙지였다는 역사의 교훈을 떠올리면서 향후의 독일은 「평화의 진원지」가 될 것임을 공약했다.
하지만 미테랑은 독일통일을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달가워 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집권 후반기의 정책목표를 유럽통합에 두기로 새삼스럽게 다짐했다.
사실 미테랑은 1차전의 비극을 전해 들으면서 유년기를 보냈고,2차전의 참상을 직접 겪으면서 역사의식을 새롭게 했던 인물이다.
미테랑은 드골이 생전에 강조했듯이 「한세기에 3번이나 싸웠던 불·독의 역사」속에서 새로운 유럽건설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유럽일가」의 가장은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46년 이래 유럽통합과 관련된 불·독간의 제의에 줄곧 지지를 표명했으며,50년대에 들어서는 유럽방위공동체 창설을 강조해왔다.
최근에는 통일독일의 유럽일탈을 방지하기 위해 유럽공동체(EC)의 정치,경제동맹강화를 소리높여 외쳐왔다.
그러나 EC는 최근 무엇보다도 신생 동구민주국가들에 대한 경제지원 확대여부를 놓고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념의 장벽」이 쓰러진 페허위에 「빈부의 장벽」이 우뚝 서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EC를 확대개편하자니 신생 민주국가들에 대한 원조총액이 증가하게 되는데 EC 회원국들의 경제현실이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이 못된다는 얘기다.
CSCE는 지난달 11일 「얄타체제의 종식」을 공식선언하면서 빈에 분쟁방지센터,바르샤바에 자유선거감시국,프라하에 상설사무국을 두기로 하고 「전쟁없는 유럽」을 위한 파리헌장을 채택했다.
하지만 동구와 서구 사이에 엄존하는 현격한 「빈부의 장벽」은 이들 2개의 유럽을 하나로 묶기에는 너무도 높다. 게다가 「유럽일가」 형성에 회의적인 일부 「식구」들간의 집안싸움도 당분간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같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파리에서 열린 CSCE는 「하나의 유럽호」를 출범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2천년대 하나의 유럽을 누빌 이 열차는 드골이 최초로 가설하고 미테랑 대통령이 재가동시킨 「위대한 유럽」의 궤도위를 달리게될 것이다.<파리=김영환특파원>파리=김영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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