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해」 얼룩지운 페만의 도발/탈냉전속 석유비상·긴장 촉발/「겁없는 대미 항전」 세계가 놀라/풍전등화의 「도박」… 전쟁 피하면 「아랍맹주」 될 수도90년 전반기 세계의 조류는 분명 분쟁과 좌절보다는 평화와 희망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구대변혁의 연장선에서 출발한 90년은 냉전종식의 원년이라는 평가속에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 진보와 화해의 순간을 연출해 냈다.
이러한 90년의 지배적 흐름을 일순에 역류시킨 사건이 8월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전격점령으로 촉발된 페르시아만 사태였다.
1개 도시 정도에 불과한 쿠웨이트 땅을 놓고 1백만 이라크군과 60만에 이르는 다국적군이 대치하고 있는 페만사태는 4개월반이 지난 지금도 그 해결향방이 불투명한 가운데 일촉즉발의 긴장이 거듭되고 있다.
세계 원유매장량의 70%를 차지하는 페만을 무대로 한 이 위험천만한 분쟁은 배럴당 18달러선에 머물던 세계유가를 한때 40달러선까지 추켜올려 세계를 석유위기공포에 몰아넣었다.
이처럼 전세계를 상대로 세기적 도박을 벌이고 있는 사담·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올해의 역사를 뒤흔든 주인공임이 분명하다.
페만사태는 세계역사에 전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분쟁이다.
아랍국가가 무력으로 다른 형제아랍국가를 점령한 최초의 사건이며 한 지역분쟁에 미 소가 공동대처한 것도 처음있는 일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아랍연합군은 사상 유례없는 가공할 화력을 페만에 집결시켰고 이라크도 결사항전의 결의를 불태우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수를 위해 경제·외교·군사적 수단을 총동원한 「목죄기」를 시도하고 있다면 후세인은 최대한 현 상황을 유지하는 「굳히기」로 맞서고 있는 것이 양측의 대결구도이다.
페만사태가 시작되자 서방측은 후세인을 「바그다드의 도살자」「중동의 히틀러」「전쟁 편집광」으로 매도해 왔다.
그러나 「탐색전」이라 할 수 있는 지금까지의 양측 대결을 중간 채점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후세인이 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지도 모른다.
후세인은 이번 사태에서 탁월한 전략가로서의 그의 진면목을 여실히 과시했다.
그는 월남전후 최대 전력을 갖춘 미군이 금세라도 이라크를 초토화시킬듯이 대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전혀 위축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다.
오히려 화전양면의 전술을 적절히 구사,사태를 장기화시키면서 미국을 곤경에 빠지도록 했다.
그는 8월 중순 대미협상을 제안하면서 동시에 쿠웨이트를 영구 합병했으며 9월초에는 부분적으로 인질을 석방하면서 한편으로는 미군에 대한 회교성전을 선언하고 사우디왕정 전복을 촉구하는 양동작전을 폈다.
후세인은 제3자를 통해 조건부 쿠웨이트 철수의사나 협상조건을 끊임없이 흘렸지만 정작 자신이 철수가능성을 언급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이로 인해 서방측은 아직도 후세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가늠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양상도 보이고 있다.
후세인이 유일하게 밝힌 페만사태 해결원칙은 쿠웨이트 철수를 이스라엘의 아랍점령지 철수문제와 일괄 논의하자는 것이다. 후세인은 미국의 대 중동정책의 아킬레스건인 이스라엘 문제와 쿠웨이트 점령을 연계시켜 이번 사태를 「아랍민족주의」와 「미 제국주의」의 대결구도로 부각·전환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이 전략은 미국이 국제 중동평화회담 개최문제를 놓고 딜레마에 빠지게 함으로써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아랍권 내부에서도 후세인은 막강한 서방세력에 당당히 맞서는 「제2의 나세르」라는 강한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후세인의 강인한 승부사적 기질은 투쟁과 음모로 점철된 그의 과거와 무관치 않다. 티그리스강변의 조그만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후세인은 20세때인 57년 아랍민족주의 정당인 바트당에 입당한 이후 끝없는 투쟁의 길을 걸어왔다. 59년 그가 친소적인 카림·카심 이라크 총리를 기관총으로 암살하려다 실패했을때 총알이 박힌 허벅지를 칼로 도려내고 사막을 넘어 시리아로 도피한 일화는 그의 성격을 잘 대변해 준다.
물론 미국이 제시한 무력사용의 최후시한인 1월15일이 임박함에 따라 후세인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전쟁만 피할 수 있다면 후세인은 많은 전리품을 얻을 것이 확실하며 아랍의 맹주라는 그의 숙원도 보다 구체화 될 것이다.
그는 「승리」와 「파멸」의 마지막 갈림길 앞에 다가서있다.<배정근기자>배정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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