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질서의 상징 독일통일 위험/“과속” 우려불구 집념의 추진/유럽운명 손에 쥔 「거인」 부상/“생전통일 회의… 이젠 독일의 도덕적 힘 되찾을 때”세기말의 문턱인 올 90년에도 장기간의 세계질서를 좌우할 역사적 사건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졌고 그 역사의 현장에는 항상 주역이 되는 인물이 있었다. 지난 1년간 변화하는 세계를 지켜본 한국일보 외신부는 이 역사의 주역들을 선정,그가 주역을 맡았던 사건과의 상관관계를 조명해봄으로써 올 한해 세계의 변화를 결산해보고자 한다.<편집자주>편집자주>
1990년은 앞으로 쓰여질 세계사에 「독일통일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89년 11월의 베를린장벽붕괴가 2차대전후 지속돼온 동·서대립 냉전사의 종말을 알린 20세기말의 일대 충격이었다면,90년 10월의 독일통일은 그 충격이 유럽과 세계질서에 가져온 「세기적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돌출한 쿠웨이트사태를 둘러싼 혼미한 논쟁도 결국은 이 독일통일이 상징하는 세계질서변화의 연장선상에 놓여진 일시적 장애물,끝이 보이는 「미로」에 불과하다. 독일통일이야말로 실로 「1990년의 주제」였다.
이 역사적인 독일통일의 주역은 물론 7천8백만 독일민족이다. 불과 1년전까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동·서독 통일을 「저지할 수 없는 대세」로 밀고 간 것은 독일민족의 통일 의지였다. 전후 40여년간 세계의 풀 수 없는 과제로 남아있던 이른바 「독일문제」에 「독일 스스로의 해답」을 제시한 것도 바로 독일 민족전체의 지혜였다.
그러나 미래의 세계사,그 독일통일의 장에 한사람의 주역이 기록된다면 그 인물은 통일 도이칠란트 총리 헬무트·콜(60)일 것이다.
그는 독일민족과 세계가 분단장벽붕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민족의 통일의지를 스스로의 것으로 결집,국내외에 천명했다.
그리고 독일인의 지혜를 혼미한 정세속에서 끌어내 의혹과 아집들이 도사리고 있는 국제협상의 험로를 돌파,그의 표현대로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통일열차」를 종착역에 안착시켰다.
그를 독일민족 최초의 통일을 이룩한 비스마르크에 비견하는 것은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0월3일 0시 베를린제국의회 광장과 브란덴부르크문에서 통일을 알리는 독일국가가 울려퍼지던 환희의 순간에 『헬무트』를 외치는 환호가 메아리쳤던 사실은 그가 통일을 이끈 향도였음을 증언한다. 독일통일의 해,90년의 「올해의 인물」은 헬무트·콜인 것이다.
82년 서독 총리로 집권한 콜은 1m90㎝,1백㎏이 넘는 거구이지만,결코 「정치적 거인」으로는 평가받지 못했었다. 오히려 아데나워,에르하르트,브란트,슈미트 등 역대총리들과 비교할 때 강력한 카리스마나 통찰력을 갖지못한 왜소하고 범상한 정치인으로 치부되기까지 했다. 독일 남서부 라인란트 팔츠주에 있는 라인강변의 소도시 루드비히스 하펜출신인 그가 독일 중앙정치에서 비중이 낮은 라인란트 팔즈주의회 의원과 주총리 등의 경력을 바탕으로 연방총리로 입신한 것과 관련,「영원한 지방정치인」으로 매도하는 시각도 많았다.
「영원한 지방정치인」으로 매도하는 시각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17세때 기민당에 참여,29세때 주의회의원,33세때 주당위원장,39세때 주총리를 지냈으며 43세때 이미 기민당 전국위원장으로 발돋움한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적들로부터 우유부단한 것으로 평가될 정도로 강인한 인내를 체득했으며 탁월한 막후협상능력과 특히 절묘한 정치적 타이밍감각을 과시해왔다.
베를린 장벽붕괴 직후 주변국이 통독에 대한 갖가지 우려와 함께 최장 「15년 이후 통일」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을때,콜도 10개항의 통일원칙을 제시하며 5년정도의 기간을 스스로 설정했었다.
그러나 지난 2월10일 유럽질서변혁의 설계자 고르바초프와의 모스크바회동에서 「통일지지」 신호를 받자 「통일열차」를 즉각 발진시켰고,무서운 속도로 끌고가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국내의 「과속」우려에 대해 『정치인들은 흔히 전례를 찾지만,통일의 기회대두는 유례없는 사건이다. 수년걸릴 일을 몇시간에 결정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지난 1년간 콜은 그의 말대로 「미친듯한 시간이지만 환상적인 시간」을 보냈다. 그는 각종 국제회의는 물론 고르바초프,부시,미테랑 등과 만나 10여차례 개별정상회담을 갖고 난관을 개척했다.
그는 『생전에 이뤄질 것을 회의했던 통일의 기회가 보였을때 생애에서 가장 열심히 일했고,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베를린장벽붕괴 직후만 해도 콜은 레이건,대처에 이어 역사의 물결에 의해 밀려날 냉전적 보수우익의 대표적 인물로 지목됐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통일과업완성과 함께 도이칠란트 총리로 부상했고,「독일의 허큐레스」란 칭호를 얻었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다』고 평가했다. 고르바초프는 『독일의 동·서간의 열쇠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독일의 장래에 대해 콜총리는 『이상주의의 산실은 독일이었다. 금세기들어 독일의 이상주의는 능욕당했으나,이제 부와 사치속에 묻혀있는 독일의 도덕적 힘을 되찾을 때』라고 말했다. 이 「서약」이 실현될때 독일통일은 진정 역사의 축복을 받을 것이고,콜자신도 「정치적 거인」으로 역사속에 기록될 것이다.<베를린=강병태특파원>베를린=강병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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