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소련간의 관계가 급진전되는 것을 보면서 처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 6·25와 83년의 KAL기 격추사건의 처리문제였다. 양국간의 새로운 장래를 여는 마당에 지나간일에 너무 집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불행한 과거를 없었던 것처럼 덮어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우리의 국민감정이나 욕심으로는 정식외교관계를 맺기전에 소련의 사과를 받고 배상까지 받았으면 했지만 그보다는 수교가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 6월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어 섭섭했지만 만남 그 자체의 중요성에 밀려 그냥 넘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공식수교가 이뤄지는 자리에서도 6·25와 KAL기 사건에 대한 얘기가 한마디도 없어 섭섭한 마음은 한층 더했다. 적어도 수교시에는 어떤 형식이든 언급이 있으리라고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는 이번 노태우 대통령의 소련 방문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수교도 이뤄지고 양국관계의 기본 골조공사도 다 끝났으니 이제는 노대통령을 맞는 자리에서 소련측의 태도표명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6·25와 KAL기 격추사건은 냉전시대에 빚어졌던 불행한 일」이라며 먼저 문제를 제기했으나 막상 양국 정상회담의 결과를 담은 공동성명인 「모스크바선언」에는 한줄도 비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언급을 회피했는지 아니면 언급을 했는데도 모스크바 선언에는 담지 않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공동선언에서 빠진 것은 정말 서운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소련은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의 입을 통해 최호중 외무장관에게 「유감이고 가슴아프게 생각한다」는 말을 전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국민들에게는 소련이 언제 사과라도 할 것인가 하고 기다려온 터라 우선 반가운 뉴스로 받아들였다. 노대통령의 방소 성과중 가장 눈에 띄는 결실이기도 하다.
외무장관으로서 그가 행한 사과발언은 소련정부의 공식태도를 대변한 것임에 틀림없다. 노대통령 자신도 그의 발언을 소련정부의 공식적인 입장표명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국민감정으로는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만으로는 다소 미흡한 감을 지울 수 없다. 이왕이면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 사과발언이 나왔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문제제기를 정상회담에서 노대통령이 먼저 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노대통령이 먼저 그말을 끄집어 냈을 때에는 단순히 한국국민의 감정만을 생각해서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절한 시기에 자연스럽게 언급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보고 싶다. 혹시 그가 내년 봄 한국을 방문할때 한국민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아껴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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