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통령의 방소 성과는 한소 관계에 있어 냉전시대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화해와 협력의 역사를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특히 6·25전쟁과 KAL기 격추사건에 대해 소련이 그 책임을 시인하고,이를 유감이며 가슴아프게 생각한다고 밝힘으로써 두 나라 관계는 지난날의 어두움을 헤치고 밝고 힘찬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소련이 6·25전쟁에 대한 책임을 솔직히 인정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행동으로서 남북한 관계도 상당히 심오한 함의를 갖게 될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냉전사가 6·25전쟁에 의한 엄청난 굴곡을 강요당했으며 지리적 분단이 민족 전체의 비극과 수난의 역사로 변질되었던 것이 바로 6·25전쟁 때문이었음을 상기하면 이제 북한도 이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6·25전쟁을 지원해주었던 소련의 집권층은 이미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동족상잔의 이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 낸 장본인인 북한지도층은 아직도 생존해 있다. 생존해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이제 남북한 관계의 새 장을 열어가는 주역임을 자처하고 있다.
우리가 6·25전쟁의 아픈 상처를 들추어내는 것은 북의 사과를 받는 게 중요해서가 아니라 지난날의 기록을 왜곡하고 이를 강변하는 허구와 위선이 불식되지 않는 한 남북한 관계에서 냉전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한소 관계가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가게 되었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 대통령의 방소 성과로 꼽혀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대목은 양국 정상이 발표한 「모스크바선언」이다. 모스크바선언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국제적·지역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력사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얼핏보면 당연한 말 같지만 소련이 북한의 군사동맹국으로서 북한에 대한 최신 군사장비를 제공하는 주된 공급원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무력불사용의 선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소련이 한반도에서 전쟁발발을 다시는 원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희망표시의 차원을 넘어 평화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전쟁발발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는 데 보다 적극적 역할을 하겠다는 강력한 의사를 문서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련이 기왕에 체결한 조약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단서조항이 붙어 있긴 하지만 이것은 북한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으려는 신중한 배려일 뿐이지 북한에 대한 군사동맹의 의무가 소련이 한반도와 아·태지역에서 창출하려는 새로운 평화질서를 저해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소련은 모스크바선언을 통해 한반도에서 군사·정치적 대결의 종식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한국문제의 해결이 평화적이고도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민주적이라는 표현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북한의 기존입장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다. 민주라는 표현이 빠져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의 실수가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북한에 있어 민주는 역사의 계급성을 부인하는 부르주아적 개념일 뿐 아니라 개혁에의 요구를 거부하는 주체사상에 대한 도전적 성격마저 띠고 있어 배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소련이 한반도문제 해결의 원칙으로서 민주를 강조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입장을 지지해온 종래의 정책이 바뀌고 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북한이 개방과 개혁의 새로운 역사적 대세를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은근한 압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스크바선언은 한반도 차원을 뛰어넘어 아·태지역 전반에 걸친 새로운 질서창출에 있어서도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모스크바선언은 소련의 적극적 참여없이는 아·태지역의 탈냉전 노력과 새 질서형성 논의가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소련이 주창해온 전 아시아안보회의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은 쌍무적 또는 다자적협의 과정을 통해 아·태지역을 평화와 협력의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소련과 공동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소련을 아시아국가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소련이 새로운 역내의 질서구축에 적극적 기여를 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한다는 점을 수용하고 이에 공동노력을 기울이기로 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미국과 일본이 과거에 얽매여 미래에의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우물거리면서 눈치만 보고 있는 동안에 한국이 먼저 소련과 아·태지역에서 새 정치 경제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파트너관계를 맺어버린 것이다. 물론 한소 관계를 한미 관계에 비교할 수는 없다. 한미 관계가 사활적인 것이라면 한소 관계는 전략적 이해 득실과 균형에 따른 공존공생의 차원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선언으로 상징되는 한소간의 급속한 접근과 잇따를 여파는 한미 관계의 부분적인 재조정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또한 일본과 소련과의 관계에서도 변화를 촉진하는 매개역할을 할 것이며 이는 한·미·일의 3각 협력체제에 새로운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모스크바선언으로 한반도와 아시아에서는 세력균형 정치를 그 내용으로 하는 새 역사의 장이 시작된 것이 분명하지만 중요한 점은 새 역사의 장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우느냐 하는 점이다.<정종욱 서울대 교수·국제정치>정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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