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9·끝

알림

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9·끝

입력
1990.11.30 00:00
0 0

◎남한 초청장 받고 고민끝 서울에/“진실 밝히자” 사명감 앞서/풍요로운 생활보고 경탄/국립묘지 참배땐 전범 죄의식에 가슴아파/독립기념관 「좌익 항일」 기록없어 아쉬움30년만의 북한방문에서 실망만 안고 소련으로 돌아왔을 때 한장의 남한초청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잠시 설명했듯이 남한 MBC TV에서 6·25 40주년 행사를 위해 나를 초청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초청장을 놓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말해 나는 오래전부터 내 조국의 다른 한편인 남한을 한번쯤 가보고 싶었다. 이런 욕구는 88년 서울 올림픽을 통해 남한 발전상을 알게되고 뒤이어 소련 남한간 인적교류가 활발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더욱 강렬해졌다.

그러나 세월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남한사회에 엄청난 재앙을 끼친 6·25남침을 주도한 「전범」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남한방문의 꿈을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또 나의 남한 방문이 북한에서 버림을 받은 것에 대한 보복을 하는 듯한 생각도 들어 주저하게 됐다.

이런 저런 번민끝에 나는 남한방문을 결정했다. 여기에는 북한방문에서 허위와 과장으로 분칠한 북한 역사를 보고 그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크게 작용했다. 더욱이 내 나이가 이미 고희를 넘어 섰고 몸도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이번이 아니면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없다는 초조감도 느꼈다.

이러는 동안 전에 전화를 통해 알게된 연세대 최평길 교수가 또 다른 초청장을 보내와 나는 본격적으로 남한방문을 준비했다.

소련측에서는 나의 남한방문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지 여권을 내주려고 하지 않아 나는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한 끝에 8월경 마침내 여권을 얻어냈다.

물론 북한측의 방해공작도 있었다. 8월초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인 한시해가 타슈켄트로 나를 찾아와 남한에 가지 말라고 강요했다.

이 기회를 이용,우리 부부는 북한방문에서 체험한 왜곡에 대해서 신랄히 비난했다. 나는 여러가지 역사왜곡 사례를 들면서 88여단에서 태어난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출생했다고 허위 선전하는 것도 지적했는데 이에 대해 한시해는 『탯줄이야 어디서 끊었건 혁명의 상징으로 백두산에서 낳았다고 하는게 무슨 잘못이냐』며 간접적으로 왜곡을 시인하기도 했다.

한시해와의 만남은 자연히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는데 그는 돌아가면서 『남한에 가면 「변절자」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경고했다.

이같은 우여곡절을 거친끝에 우리 부부는 10월15일 마침내 서울에 들어오게 됐다.

내가 6·25전쟁중 인민군 작전국장으로 서울땅을 밟아본지 정확히 40년 4개월만에 다시 서울을 오게 된 것이다.

나는 남한에 입국하면서 내 자격지심 때문에 상당한 불안감을 느꼈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여러 사람들이 과분할 정도로 우리 부부를 따뜻이 환대해 주었다.

우리 부부는 11월5일 출국할 때까지 20일동안 남한에 머물면서 여러지역을 두루 여행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모든 것이 부족한 소련에서 살다온 나에게 남한의 풍요롭고 발전된 모습은 경이롭기만 했다. 또 4달전에 다녀온 북한의 생활상과도 좋은 비교가 됐다.

나는 서울시내를 돌아보면서 40년전 본 서울거리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어리둥절할 뿐 이었다.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곳은 중앙청(현 국립중앙박물관)과 시청 정도였다.

그러나 중앙청도 그때와는 달리 앞에 광화문이 세워져 있었으며 주변 모습도 전혀 달라져 있었다. 중앙청을 보면서 나는 40년전 남한의 해방자이며 점령자라는 자만심에 들떠 중앙청내에 설치됐던 인민군전선사령부를 드나들던 내 젊은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그 중앙청에 지금 나는 몸도 성치않고 말도 더듬는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서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내 모습이 6·25의 도덕적 역사적 패배를 상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방문중 가장 인상이 깊었던 몇곳을 꼽는다면 남대문시장과 울산 현대자동차공장,목천의 독립기념관 등이었다.

남대문시장에서 나는 각종 소비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모습에 우선 놀랐고 또 그 품질이 소련제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는데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현대자동차공장을 견학할 때는 기계가 기계(자동차)를 만드는 광경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우리 부부는 여행중 특히 역사 유적을 주의깊게 살펴 보았다. 그것은 북한에서 본 역사 왜곡에 너무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독립기념관과 몇몇 고궁을 돌아보면서 나는 남한이 모든 시대의 역사유적들을 잘 보존하고 역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독립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한가지 아쉽게 느낀 점도 있었다. 그것은 항일독립운동을 한 많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자료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비록 남한의 적이기는 하지만 과거 그들도 항일독립운동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남한방문중 제일 가슴이 아팠던 순간은 국립묘지를 참배했을 때였다.

그곳에서 6·25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전사자들의 묘역을 직접 보게되니 나의 마음 깊숙히 자리잡은 죄의식이 다시 살아나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묘비를 하나 하나 보면서 통한을 간직한 채 잠들어 있는 젊은 영혼들과 그들을 잃고 비탄에 젖었을 부모 형제들에게 진심으로 참회했다.

나는 국립묘지를 떠나오면서 방명록에 『이땅에 영원히 전쟁이 없는 평화가 깃들기를 충심으로 기원함』이라고 서명했고 지금도 이를 기원하고 있다.

나는 국립묘지를 다녀온 후 며칠간 소화가 안될 정도로 괴로웠다.

이런 민족적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민족은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내가 남한에 머무르는 동안 남한의 고위대표단이 북한을 방문,김일성을 만나는 소식에 접하고 나는 정말 기쁘고 반가웠다.

그러나 나는 김일성이 평화적 통일을 원하고 있다고 믿진 않는다. 지난 5월의 북한방문은 나의 이런 확신을 더욱 굳혀 주었다. 북한이 지금 남한측의 전면교류 제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남북간의 경제력 차이가 너무 심하고 허구에 찬 김일성 숭배가 일시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게 내 판단이다.

나는 극도로 통제된 북한 사회를 피부로 체험하면서 김일성 정권이 향후 5년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다.

소련이나 동구에서 보듯이 개방과 자유라는 시대의 조류를 김일성이라고 거스를 수는 없다. 최근 김일성이 남한과의 접촉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정권의 속성상 그런 움직임은 금세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나는 김일성이 진정으로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평화통일을 추진하려 한다면 먼저 왜곡된 북한의 역사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또 그의 1인집권을 위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숙청을 당한 많은 북한인사들을 복권시켜야 한다. 그들의 피맺힌 원한도 풀지못하는 김일성이 어떻게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와 한때 항일운동을 같이 했던 동지의 입장에서 그가 그 시절의 순수했던 애국심으로 돌아가 개인적 욕심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 헌신하라고 진심으로 당부하고 싶다. 이것이 나의 증언을 마치면서 남기고 싶은 마지막 말이다.<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