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중퇴후 잡역부 거친 입지전적 인물/곡예사 아들 출신… 세파 온몸체험/외무·재무 역임… 정적도 찬사 보내11년 장기집권의 대처에 뒤이어 영국을 이끌게 된 존·메이저 신임총리의 등장은 영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세기말 2달 모자라는 47세에 총리가 된 로즈베리경 이후 1백년만에 영국의 최연소 총리가 된 메이저는 약관 47세. 귀족적 용모에 소탈한 성품. 입지전적 성장배경등으로 매너리즘의 나락에 빠져들던 영국의 90년대에 활력을 불어넣을 기수로 떠오르고 있다. 이같은 기대는 그에 대해 내려지던 「젊은사자」와 「대처의 애완견」이란 상반된 평가를 일순 잠재우고 있다.
지난 79년 집안의 몰락을 더이상 좌시할 수 없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종가맏며느리」가 대처였다면 메이저는 그 집안을 이어갈 장손으로 키워졌다.
그러나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성장과정은 독특하다. 서커스단의 공중곡예사겸 악사였던 부친 에이브러햄·토마스는 메이저가 태어났을 때 66세였다. 차츰 시력을 잃어가던 부친을 부축해 나선 산책길은 메이저에게 푸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세상살이의 산경험과 해박한 지식으로 가득찼던 부친과의 대화는 메이저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차분하면서도 폭넓은 인격체로 성장할 밑바탕이 됐다.
비록 학력은 짧지만 영재들을 위한 공립 러트리시 중학교에 입학할 만큼 두뇌도 명석했다. 16세때 가정형편과 「학교생활이 따분해」 고등학교를 그만둔 메이저는 건축공사장의 잡역부 또는 실업복지수당 혜택자로 현실과 맞부딪치기도 했다. 언젠가 『대학을 안나와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메이저는 『울타리의 다른 켠에서 너무나 소중한 많은 경험을 체득했다』며 당시의 생활을 귀히 여겼다.
이처럼 처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그를 18세때 스탠더드 차터드 은행에 들어가 15년만에 이사자리에 오르게 했다.
또한 74년 한차례 낙선끝에 79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메이저는 대처의 「계급없는 사회건설」의 한 표상처럼 87년 재무차관 89년 7월 외무장관 그리고 그해 10월 니겔·로슨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재무장관에 임명되는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그리고 끝내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로 대표되는 명문교 출신들이 좌지우지해온 귀족색채의 보수당내에서 일약 11년만에 당수겸 총리에 오른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총리공관인 다우닝가 10번지 바로 옆집인 11번지의 주인인 재무장관으로 발탁됐을 당시 일부에서 「치마폭에 감싸인 풋내기」라는 빈정거림이 나온데서 보듯 대처의 후광이 컸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논리정연한 지식,타협과 이해로 자신의 정적들조차 「미스터 나이스맨」이라며 두손을 들게 만드는 인간적 매력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최대의 강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순종형의 무골호인만은 결코 아니다. 재무차관시절 「작은정부」를 지향하는 대처정책에 따라 행정부처간에 잡음이 일 소지가 큰 예산긴축안을 떠맡아 별무리 없이 조정한 것도 그의 소신있는 결단력이 큰 힘이 됐다는 평가이다.
그의 동료들은 메이저의 지역구가 올리버·크롬웰의 고향인 헌팅돈인 것을 들어 그를 크롬웰에 비유하기도 한다. 온화한 성품이지만 크롬웰처럼 강단이 있어 그의 「뼈속에 철심이 들어 있다」는 비유도 나온다.
실제로 그는 나이지리아은행 근무시절 교통사고로 한쪽 무릎받이뼈를 잃어 철심을 박았고 정적들은 이를 들어 메이저의 「유일한 특징」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반백의 은발을 빗대 대처의 그늘 속에서 자란 무채색의 「회색빛」이라는 지적이 나오는데서 드러나듯 불분명한 정치적 컬러와 금융·재정이라는 전공분야외에는 식견이 좁은 것 등이 앞으로 그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오페라가수 조안·서더랜드 전기의 저자이며 평범한 주부를 고집하는 노마여사와 만난지 3주일만에 결혼,슬하에 엘리자베스(19) 제임스(15) 등 1녀1남을 두었다.<윤석민기자>윤석민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