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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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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8

입력
1990.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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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받아 30년만에 평양방문/북,남 접촉막기 위해 회유/막상 여행중엔 홀대받아/선물준비 불구 김일성·옛전우 못만나/박물관에 내기록 없어 또다시 배신감내가 북한에서 돌아와 소련생활에 적응하기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소련 당국의 배려와 아내의 헌신적 보살핌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59년말 북한에서 쫓겨온 우리 가족은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질오르다시에 정착했다. 나는 이곳에서 소련군 대좌대우를 받으며 이따금 크질오르다시 군사 동원부에 나가 내 전쟁 경험에 대한 강연을 하며 생활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이 중앙아시아의 오지에서 추운겨울을 보내기는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타슈켄트 집단농장에서 중학교 교사로 일하는 동생 유채순의 권유로 60년 6월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타슈켄트로 이주했다. 타슈켄트에서 처음 6개월간은 집도 없어 동생집에 얹혀 살기도 했으나 다행히 타슈켄트 군사동원부에서 가옥을 배당해 주고 군사연금도 지급해 주어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됐다.

그런 반면 중풍으로 건강이 나빠져 직장은 포기하고 연금생활에 의존하게 됐다.

현재 나는 소련군 장성급의 연금수준인 월 4백루블을 받고 있다. 산부인과를 전공한 아내 김용옥은 타슈켄트 병원에서 일하며 월 3백루블 정도를 받는다. 따라서 우리 두사람의 월수입은 7백루블 정도이며 이 액수는 소련에서도 중상위 계층에 해당하는 비교적 넉넉한 수준이다.

세번에 걸친 중풍으로 몸 왼쪽부분이 마비되고 기억력을 잃어버리는 병고에 시달렸지만 의사인 아내의 보살핌으로 어느 정도 건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활해오다 지난 5월 나는 뜻밖에 30년만에 북한을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됐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타슈켄트 과학연구원에 대학원 연구생으로 유학온 김광회라는 북한청년이 살고 있었는데 그가 어느날 나를 찾아와 북한 소식을 들려주면서 『조국을 방문할 의사가 없느냐』고 물어본 것이 그 발단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인 지난 2월 모스크바주재 북한대사관에 근무하는 무관 김정찬 소장이 김광회를 대동하고 우리집을 방문했다.

그는 처음보는 나를 계속 『작전국장님』이라고 부르며 건강과 생활의 어려움을 묻는등 호의를 표시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자신이 『김일성 수령의 임무를 받고 방문했다』며 『작전국장님은 역사에 기록된 인물로 북한 건국의 유공자이니 이제 평양을 방문,조선인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보시라』고 북한방문을 권유했다.

그는 또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숙청당시의 이야기를 꺼내며 『과거일은 수령동지가 한 것이 아니라 김광협·김창만 등이 모함을 해 그리된 것이니 이제는 노여움을 푸시라』고 회유했다.

이때 나는 몸이 좋지 않아 아내가 주로 이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이 말을 듣던 아내는 참지 못하겠던지 다음과 같이 쏘아 붙였다.

『아랫사람들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는 그런 속보이는 짓은 하지 마시라요. 그래 김일성 수상은 88여단에서 동거동락하고 10년 넘게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낸 고위장성이 영하 22도의 엄동설한에 사상검토를 받고 죄인처럼 쫓겨난 일을 어찌 몰랐단 말이요』

이런 항변에 당황한 김정찬 소장은 『그점은 김일성수령 동지도 잘못했지요』라고 순순히 시인한 뒤 『모든 일은 과거사로 돌리고 평양을 방문해 달라』고 재삼 간청했다.

이들이 북한 사회에서는 감히 상상키도 어려운 언행을 하면서까지 나를 초청하려는 속셈은 당시 6·25 40주년을 앞두고 남한 TV에서 전쟁에 참여했던 많은 소련교포들을 초청했기 때문에 이를 막아보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런 얄팍한 속셈이 괘씸했지만 평양이 고향인 아내가 몹시 가고 싶어하는 눈치고 나 역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 버릴 수 없어 그들의 초청을 수락했다.

우리 부부를 공식적으로 초청한 단체는 89년 10월에 결성됐다는 조소 통일촉진위원회였다. 이 단체는 한소 관계가 급진전되고 이에 따라 남한을 방문하는 소련 교포들이 늘어나자 북한에 우호적인 교포여론을 조성키 위해 만든 단체로 타슈켄트에도 그 지부가 세워졌다고 한다.

이때 나와 함께 북한 초청을 받은 소련 교포는 과거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전노동당 간부부장 박영빈부부,전노동당 군사위원 이춘백부부,전해군사령관 이세호부부,전만경대 혁명학원장 황성복부부 등이다.

우리 일행은 5월3일 타슈켄트역에서 합류,열차편으로 모스크바로 갔으며 그곳에서 북한대사관 요원들의 영접을 받았다. 우리 일행은 모스크바에서 5월9일 평양으로 출발할때까지 5일간 여관에서 머물렀는데 그 비용은 모두 우리가 부담했다.

또 우리 일행은 각기 2백루블씩을 갹출,김일성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기도 했다.

마침내 조선민항기에 몸을 싣고 평양으로 향하자 지나간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 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벅찬 감회가 밀려 왔다.

나는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하면 과거 88여단에서 희노애락을 같이 했던 옛빨치산 전우중 한두명쯤은 마중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들은 북한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인민군 승리박물관장 태병렬,만경대 혁명학원장 김용연,노병위원장(재향군인회장) 전문섭 등이다.

그러나 막상 순안비행장에 내렸을 때 우리를 영접한 사람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중앙당 교포위원회」에서 나왔다는 안내원 뿐이었다.

아무튼 우리 일행은 평양교외의 영빈관에 여장을 풀고 다음날부터 북한측이 지정해준 일정에 따라 13일간 북한의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우리의 여행코스는 북한이 해외동포나 남한사람들을 맞을 때면 으레 안내하는 그런 곳들이었다. 즉 주체사상탑·만경대·조선혁명박물관·인민문화궁전·서해갑문·백두산 등이다.

나는 이 여행을 통해 다시한번 김일성에게 뼈아픈 배신감을 느끼고 북한사회에 환멸을 갖게됐다.

내가 조국해방투쟁박물관이란 곳을 방문했을 때 이곳에는 6·25에 참전한 북한인민군 영웅들의 사진과 투쟁기가 전시돼 있었으나 나처럼 숙청된 간부들의 기록은 전혀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역대 인민군 작전국장 명단에 아예 내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이었다.

옛 전우들과의 만남도 불쾌하기만 했다. 나는 만경대혁명학원을 갔을때 비로소 이곳 관장이던 김용연을 만났으나 그는 나를 반가워하기는 커녕 묻는 말에만 대꾸하는 등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고 학원안에 그의 관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초대하지도 않았다.

88여단에서 함께 생활했던 조선혁명박물관장 황순희(유경수 전탱크사단장 부인)가 박물관에서 나를 만났을 때 비교적 반갑게 대해주었지만 그녀 역시 김일성을 찬양하는 글을 써달라고 해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 여행중에 만난 북한 사람들도 우리가 소련교포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아주 차갑게 대했다.

그것은 소련이 남한과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적개심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생각됐다.

우리 일행은 북한방문중 옛 전우는 물론이고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만나지도 못했다. 김정일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해간 우리 일행은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더이상 북한땅에 머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정을 앞당겨 5월23일 귀국해 버렸다.

내가 평양을 떠날때 북한측은 김정일의 선물이라며 일본제 보청기 하나를 주었다.

북한측은 우리가 소련에 돌아온 뒤 북한에서 받은 홀대에 불만을 표시하자 지난 8월에 재차 우리 일행을 초청했다.

나는 이 초청을 거절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시 북한을 방문,1개월간 머물면서 이전과 달리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김일성이 주최한 만찬에도 참석했고 과거 북한에서 가졌던 계급보다 1계급 특진된 새 군복을 받아 입고 군사열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나는 남한 방문을 결심하고 있었다.<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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