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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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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7

입력
1990.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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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 첫사랑 여인 극적재회 결혼/해방직후 평양서 첫 만남 “어리다”처가서 거절 이별/6년만에 본 그녀는 간호장교로 참전/한때 동거녀 소 당국 불허로 성혼 못해하바로프스크 88여단에서 김일성이라는 젊은 소련군 대위를 만나 북한을 그의 개인 왕국으로 만드는데 일익을 맡다가 결국은 그에게 배신을 당해 소련으로 쫓겨가기까지 나의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나는 내아내 김용옥과 가족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야 할 의무를 느끼고 있다.

51년 평양에서 나를 만나 지금까지 30여년의 세월을 함께 해온 아내 김용옥은 내가 북한에서 숙청의 시련을 당할때나 그뒤 소련에 돌아와 3차례나 중풍을 맞아 온전치 못한 몸이 됐을때도 변함없는 애정으로 나를 보살피고 격려해준 훌륭한 반려자이다.

또 그녀는 6·25 전쟁중 인민군 간호장교로 낙동강 전선까지 종군한 경력을 갖고 있어 나의 회고를 보완해주는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들의 만남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으로 설명해야 할 만큼 극적인 면이 있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소련에서 막 북한으로 돌아온 직후인 45년 9월말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소련군 평양 경비사령부의 통역겸 소련 헌병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날 소련에서 들어온 영화필름이 북한에서 잘 보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평양 영화관리소를 방문했다.

영화관리소 사무실에 들어섰을때 가장 먼저 내 눈길을 끈 것은 고운 한복을 입고 사무를 보던 한 앳된 처녀의 모습이었다. 해맑은 얼굴에 얕게 쌍꺼풀이 진 귀여운 눈을 크게 뜨고 낯선 군인을 쳐다보는 그녀의 첫 인상은 총각인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녀에게 『영화필름이 사회단체에 잘 배급되느냐』는 사무적 질문을 하면서 슬쩍 이름을 물어보았다. 김용옥이었다.

이날 이후 나는 틈이 날때마다 공무를 핑계대고 그녀 사무실을 찾아갔고 나중에는 대동강가에서 둘만의 밀회를 즐길 정도로 가까워 졌다. 이때 내 나이는 28세이고 그녀는 16세였지만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

그녀의 부모는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 집사였지만 소련군인 신분인 나를 비교적 잘 대해 주었다.

그러나 어느날 그녀의 두 오빠가 나를 찾아와 『용옥이는 나이가 어리고 공부를 더 해야 하니 결혼을 하고 싶으면 공부를 끝낼때까지 기다려라』고 통보했다.

이 일방적 통보가 있은뒤 우리의 교제는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첫사랑에 좌절을 맛본 나는 한동안 그녀를 잊지 못해 번민했다.

나는 허전한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소련군 관사에서 나를 뒷바라지하던 여자와 잠시 동거도 했고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최금순이란 여자와 가깝게 지냈으나 소련군 정치위원회에서 학력도 없는 이들 두 여자와의 결혼을 불허,또한번 좌절을 경험하기도 했다. 현재 큰딸 유희복(42)은 동거했던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였다.

6·25가 시작되면서 나는 이런 개인사를 접어버리고 전쟁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

그후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져든 51년 봄 인민군 중장이던 나는 평양에 있는 중국지원군 영화촬영소에서 민족보위성 주최로 열린 전쟁참전 여성 좌담회에 참석하게 됐다. 이 좌담회에서 나는 낯익은 인민군 간호장교(중위) 한명을 발견했다. 바로 6년전에 헤어진 나의 첫 연인 김용옥이었다.

우리는 이 극적인 재회를 반신반의하며 그동안 서로의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나와 헤어진뒤 평양에 미국선교사가 세운 정의여학교를 마쳤고 47년 평양의전에 입학,산부인과를 전공했다고 한다.

그녀는 49년 이 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는데 평양의전의 수석졸업생은 혁명전사로 인민군 야전군 간호원으로 임명되는게 당시 관례였다.

이에 따라 그녀는 야전병원 간호원(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제식훈련·사격·체육·갱도채굴 등 군사훈련도 받았다. 그녀는 50년 6월16일 38선 부근 부대에 배치됐다 전쟁을 맞았다.

전쟁이 나자 그녀는 소위로 임관,간호장교가 됐으며 진격하는 인민군을 따라 연천·의정부·서울로 남하했다.

그녀 역시 이때 처음으로 서울땅을 밟았으며 인민군 전사들을 따라 중앙청과 경무대(현 청와대)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녀는 이때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 몇장과 은수저를 갖고 나왔는데 서울 이남으로 남하하면서 물을 먹을때는 반드시 이 은수저를 사용해 혹시 독약이 뿌려지지 않았는지를 검사했다고 한다.

한편 이 시기에 그녀는 두 오빠를 잃었다. 큰 오빠 김용성은 사단정치위원으로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행방불명이 됐으며 작은오빠 김용주는 제105 탱크사단 전사로 수원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녀는 주로 후방에서 환자수송 업무를 담당했는데 낙동강 전투가 장기화되고 전사자가 늘어나자 인민군 제4사단에 새로 배속되어 진주까지 내려와 야전병원에서 환자를 돌봤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퇴로가 차단되자 그녀 부대는 해체돼 개별적으로 후퇴를 하게 됐다.

부대장은 개별적으로 산악지대를 통해 후퇴하되 1차로 소백산,2차로 태백산에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이 지시에 따라 일단의 인민군 패잔병들과 함께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을 따라 퇴각했다.

그녀가 이 험난한 산악지대를 통해 후퇴하면서 얼마만큼 고초를 겪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 일행은 미군의 공습을 피해 산구릉지대를 따라 야간에만 이동했으며 낮에는 숲속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녀는 전쟁에 숙달된 인민군 전사들을 따라가기는 힘들었지만 군에서 유격등 군사훈련을 받은 덕분에 대열에서 뒤처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사전준비 없이 후퇴를 했기 때문에 중간에 식량이 모두 바닥나 큰 고통을 당했다. 그녀 일행은 인근마을에 내려가 식량을 거둬 오거나 그것도 여의치 못할 때는 산딸기·칡·풀 등을 뜯어 먹으며 허기를 채워야 했다.

이런 고생끝에 그녀는 무사히 황해도에 도착,본부에 무선연락을 해 평양으로 귀환했다.

그뒤 그녀는 51년 중위로 승진,야전병원에서 계속 근무하던중 나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결혼을 요구했다. 물론 과거의 여자관계에 대해서는 솔직히 고백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며 나의 청혼을 거절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내가 일하던 작전국으로 발령한뒤 끈질기게 접근했다.

결국 그녀는 나의 구애에 굴복,아이가 있다고 반대하는 부모들을 설득해 51년 가을 나와 결혼했다.

나는 그녀와 사이에 3형제를 낳았다.

장남 흥군(36·소련명 꼴라이)은 54년 평양에서 출생,타슈켄트 중학교를 거쳐 컴퓨터 기술강습소를 나온뒤 지금은 타슈켄트 군사무기공장에서 컴퓨터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 1급 기술자이기 때문에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고 있지만 장가를 못보낸 것이 큰 걱정이다.

차남 흥천(35·소련명 알로샤)도 타슈켄트 공업학교를 나와 전기기술자로 일하고 있다. 이 아이는 한인 처녀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막내 유라(28)는 북한에서 돌아와 낳은 아들로 트럭운전사로 일했으나 사고로 발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다. 막내 이름은 소련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가가린에서 따온 것이다.

앞서 말한 장녀 희복은 타슈켄트 사범대학을 졸업,설계사로 일하고 있는데 첫 결혼에 실패,혼자 살고 있다.

나는 소련에 귀환한지 얼마만에 중풍을 맞아 직장생활은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소련 당국에서 내가 독소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경력을 인정해주어 연금을 조금 받고 있다. 나는 조국해방을 위해 소련군 정찰부대에서 활동했지만 그 공로는 조국 북한이 아니라 소련에서 인정 받고 있는 셈이다.<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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