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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동서독 언론이 통독에 미친 영향」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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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동서독 언론이 통독에 미친 영향」 세미나

입력
1990.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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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서독 TV 통독에 결정적 기여”/“동독관련 보도 제약없이 방송/동독인 90%가 서독 TV 시청”/“공산주의 추종 동독 언론인 「처리」 고민/구동독 언론 앞으론 재계 간섭 새 우려”○언론연구원 주최

지난달 중순 평양에서 열렸던 제2차 남북총리회담을 계기로 통일과 관련한 남북한 언론의 역할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한국 언론연구원은 23일 구동서독의 언론학 교수 2명을 초청,「동서독의 언론이 통독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는 세미나를 개최했다.

게어하르트·담프만 구서독 마인츠대학 언론학 교수는 이날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통해 『서독의 TV가 동독 공산당의 지배체제를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말하고 요즘 독일 언론계는 『과거 공산주의 노선에 충실했던 동독 언론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과거 청산」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볼프강·클라인베흐터 구동독 라이프치히 소재 카를 마르크스대학 국제언론학 교수는 서독의 언론이 독일 통일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한 뒤 『과거 국가의 통제를 받던 동독 언론계가 앞으로는 재계의 제약을 받을 우려가 있다』며 독일 언론의 상업화 경향에 우려를 나타냈다.

클라인베흐터 교수는 또 『독일의 재통일 이전에도 동독인의 90%가 서독TV를 시청했으며 서독 언론인의 과반수가 동독을 방문했었다』고 밝히고 정보개방과 언론인 교류가 통독의 밑거름이 됐음을 상기시켰다.

두 교수의 주제 발표문을 요약한다.<편집자주>

▷담프만 교수◁

서독 언론의 역할에 대해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그들이 준수해온 3가지 정치적 기본원칙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서독 언론은 통일이 될 때까지 동독이 전체독일의 한 부분으로서,또한 과도기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둘째 나치하의 경험은 전후 서독으로 하여금 자유민주공동체로서의 존재확인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점은 언론의 경우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동독에 관한 보도에 있어서 제약을 받을 수 없다는 원칙으로 나타났다. 또 서독 언론인들은 동독당국이 허가만 해주면 언제고 동독에 들어갈 수 있었다.

○통일논쟁 충실히 보도

셋째 서독여론은 통일정책에 관한 사민당과 기민당의 상반된 논쟁을 충실하게 보도했다. 서독인들은 이들의 정치적 논쟁은 걸러서 취급했지만 쌍방의 극단적인 입장은 그대로 전달했다. 이와 함께 많은 좌익성향의 언론인들이 동독을 주권국가로 인정해야 하며 서독방식의 통일요구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신문과 잡지 등 인쇄매체는 동독의 국경을 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동독 입국자들은 철저히 조사를 받았으며 묵은 신문지로 포장된 선물조차도 통과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의 인쇄매체는 동독 지도층에 만연된 정신적 부패와 위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어떤 정보매체도 서독 TV만큼 통독에 중요한 역할을 해내지는 못했다.

서베를린은 동독의 한 가운데에 섬처럼 놓여 있어 TV방송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대다수의 정계 엘리트와 인문과학자 및 예술가들이 모여살고 있던 동베를린으로 TV전파가 발사될 수 있었다.

○공산당 전파방해 단념

동독 공산당은 당초 서독 전파의 수신을 방해했으나 동독인들은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공급처로서의 서독 TV 수신을 위해 평화적이며 지속적인 투쟁을 계속했다. 결국 동독 공산당은 전파방해를 단념했다. 다만 동독정권이 통제할 수 있었던 군부대나 학교,기타 관변단체의 회의장 등에서만은 동독 최후의 날까지 서독 TV의 수신이 금지됐었다.

서독 특파원들이 동독에 상주하게 된 이후 서독 언론의 동독에 대한 보도는 질적·양적으로 크게 향상됐다. 대부분 익명을 요구하는 동독시민들이 편지나 전화를 통해 다양한 소식을 전해왔다. 동독내의 서독 언론인들은 또 동독 지식층,특히 동독의 상황을 과감하게 비판하는 작가들과도 긴밀한 접촉을 갖게 됐다. 이렇게 제공받은 보도자료들을 대부분 서독 TV를 통해 동독 전역에 알려지게 됐다.

서독 TV방송은 장벽을 넘어 서독의 밝고 어두운 면을 동독에 보여주었고 동독 매체들과는 달리 동독의 점진적인 몰락을 동독내에 거짓없이 전파했다. 이처럼 동독공산당(SED) 지도부가 동독인들과 컨센서스를 이루지 못한 데에는 서독 TV의 영향이 컸다.

독일은 지난 10월3일 헌법상의 통일을 이룬 이래 실질적인 통합을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다. 동독지역에서도 언론이 되살아나고 있다.

억압적인 체제하에서 언론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수천 명의 전직 동독 언론인들이 공산주의 노선에 충실했던 추종자로 밝혀지거나 사실을 왜곡하고 기만해왔다면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무척 어렵다. 하지만 경험에 비춰볼 때 일괄적인 제재는 정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각기 개별적으로 심사돼야 한다.

▷클라인베흐터 교수◁

서독 매스컴 중에서도 통신과 TV가 지난 89년 가을부터 시작된 동독의 변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동독정부의 언론정책은 국민에게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였다. 중앙통제하에 있던 언론은 비능률적인 경제제도나 환경오염,인권침해 등의 보도를 삭제하거나 축소했다. 서방세계에 관한 뉴스도 천편일률적이거나 적대감을 유발시키는 방향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사회적인 변혁과 함께 언론체제도 바뀌기 시작했다.

○당과 무관한 독자체제

제1차 전환기가 89년 10월부터 지난 3월18일 총선 사이에 일어났다. 이 기간중 동독의 일부 신문은 당과 무관한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고 과거 정부나 당에서 핍박받던 언론인들이 새 편집인으로 발탁됐다. 아울러 새로운 일간지와 주간지가 창간됐다.

제2차 전환기는 지난 3월18일부터 10월3일까지로 잡아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동독 언론체제가 서독 언론체제로 변신하는 과정이다. 이 과도기에서 동독의 언론매체는 자유경쟁체제로 변신하기 위한 산고를 겪어야 한다. 낙후된 인쇄기계의 교체와 방송사들의 감원바람 등이 문제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통일된 독일은 이제 제3의 전환기,즉 형식상의 통일에서 실질적인 통합으로 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동서독은 하나로 통일됐으나 물질적·정신적인 면에서의 실질적인 통일에는 아직도 많은 노력이 따라야 한다.

요즘 동독의 신문들은 한층 치열해진 취재경쟁과 경제적인 경쟁 속에서 나름대로의 발전을 꾀하고 있는데 여기에 서독에서 온 새로운 경쟁자들이 끼어들어 한층 복잡한 양상이 노출되고 있다.

○유럽 언론 통합에 기여

한편 방송계에서는 방송이 문화적인 차원을 벗어나 상업적인 차원에서 제작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크게 일고 있다.

일부 비평가들은 동독의 방송제도를 서독의 방송제도와 비교해서 재구성하지 말고 유럽 각국의 제도를 연구해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현재와 같은 정보화시대에 독일 자체내의 제도에 의존해서 방송을 조직한다는 것은 너무나 편협한 처사이므로 유럽 전체와 세계를 향한 방송으로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동서독의 통일은 전체 유럽의 언론과 정보를 통합시키는 데에도 기여해야 한다. 오는 92년 헬싱키에서 개최되는 전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서 논의될 주요 안건중의 하나가 바로 유럽에서의 정보와 언론의 통합에 관한 것이다. 이는 흥미롭고도 도전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이상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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