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파리에서 개막된 전유럽안보협력회의(CSCE)는 유럽 및 세계질서의 변전에 얽힌 역사의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노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역사의 아이러니는 우선 냉전종식 이후 유럽의 새로운 평화질서를 구축할 CSCE 체제가 전후 유럽안보의 「최대위해」로 지목돼온 소련에 의해 지난 54년 최초 제안됐었다는 데 있다.
당시 아데나워 서독 총리를 비롯한 서유럽과 미국은 이 제안을 서독과 서유럽의 「격리」를 노린 선전으로 치부했었다. 그러나 지난 75년 냉전 타파의 첫 이정표를 기록한 헬싱키 CSCE 회의를 주도해 성사시킨 것은 서독의 겐셔 외무장관이었다. 그리고 이번 파리회의를 앞두고 CSCE 역할 확대에 지극히 소극적인 미국과 서유럽간의 갈등조정에 진력한 것도 독일과 소련이었다.
소련의 「위협」에 가장 노출돼 있던 독일은 지금 소련과 공조,미·서유럽의 대소동맹 나토의 역할종식을 추구하고 있다. 「위협」의 주체였던 소련은 바르샤바동맹의 소멸을 촉진할 CSCE 체제구축에 앞장서고 있다. 반면 서유럽의 대소 보호역을 자임해온 미국은 최대의 「피보호자」 독일마저 더이상 필요 없다는 나토의 고수를 고집,갈등을 빚고 있다.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같은 아이러니와 관련,부각되고 있는 것은 이번 파리 CSCE 회의의 막후를 지배,이 회의의 역사성을 훼손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는 쿠웨이트사태의 의미다.
부시 미 대통령은 파리회의를 앞두고 17일 개혁동구의 도덕적 상징인 하벨 체코 대통령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대가로 「침략자는 용납돼서는 안 된다」는 지원선언을 이끌어냈다. 이어 18일 독일을 방문해서는 통일독일의 국제무대에서의 「지도적 책임」을 강조,파리에서의 쿠웨이트 논의와 관련된 압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독일은 파리에서의 쿠웨이트 논의를 「무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리고 CSCE 회의의 또다른 주역 고르바초프 소 대통령은 하벨과 비교할 수 없는 도덕적 권위를 지닌 교황바오로 2세와 회동,쿠웨이트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함께 촉구했다.
결국 이같은 양상은 적어도 유럽에서의 평화질서에 관한 한 기존 「배역」이 역전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아직은 「속삭임」에 그치고 있지만,쿠웨이트사태 자체가 일본의 진주만기습이나 북한의 한국전 도발과 같이 미국엔 필요했던 「볼모」라는 시각이 대두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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