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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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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4

입력
1990.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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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전후 「피의 대숙청」 착수/소련파 거두 허가이 첫 희생물/박헌영 미제 스파이 죄목 처형/사전공작·이이제이로 절대권력 장악/연안파 「개인숭배 비판」실패 중국 망명김일성이 오늘날 북한에서 신격화된 절대권력의 지도자로 군림하게 된 것은 6·25전쟁 후 근 1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피의 대숙청」의 결과이다.

김일성은 이 대숙청을 통해 그에게 도전할만한 경쟁세력을 뿌리째 뽑아버렸고 북한 주민들을 그의 충성스런 신민으로 길들였다.

사회주의국가에서 숙청이란 소련의 스탈린 대숙청ㆍ중국의 문화대혁명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주의이념 투쟁과 권력투쟁의 두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봉건적 체제를 혁명적 신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념투쟁이 빚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일성의 대숙청은 순수한 사회주의 이념투쟁보다는 추악한 권력투쟁에 가까웠다.

김일성은 언제나 사상·이념이라는 간판을 내세우며 숙청을 합리화했지만 그 이면에는 권력의 어두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김일성이 그의 정적들을 숙청할때 내걸었던 「죄목」들은 너무나 부당하고 조작된 것이 많았다.

김일성의 숙청작업은 북한정권 수립 초기부터 시작됐지만 본격화된 것은 역시 6·25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의 숙청작업을 시기별로 본다면 6·25 직후,56년 스탈린 격하운동 직후,58년 사상검토운동,60년 후반 군부숙청 등으로 크게 구분해 볼 수 있다.

○참전장성 90% 숙청설

김일성은 숙청작업을 통해 그의 탁월한 정치술수를 과시했다. 그는 소련파를 칠때는 연안파와 남로당파를 이용하고 연안파를 탄압할때는 빨치산파와 국내파를 동원하는 등 이이제이의 전술을 훌륭히 구사했다.

또 각 파벌의 핵심인사를 그의 편으로 끌어들여 그 파벌을 소탕하는데 이용한 뒤 최후에는 그 인사마저 숙청했다.

김일성의 숙청작업은 밀실에서 만들어진 계획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 그리고 매우 광범위하게 진행됐기 때문에 그 전모를 파악키는 어렵다.

나는 언젠가 6·25전쟁에 참전했던 인민군장성중 90% 이상이 숙청됐다는 말을 들은 바 있는데 국가·당 등 타분야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나는 내가 직접 체험한 일부 고위지도자의 숙청과정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말해 보겠다.

6·25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51년말 김일성의 첫번째 숙청 희생물이 된 사람은 소련파의 우두머리 허가이였다.

김일성이 이 시기에 굳이 숙청의 칼을 든 배경은 전쟁실패로 그의 권위가 크게 훼손됐고 각 파벌들로부터 전쟁책임을 추궁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대개 숙청과정은 사전에 대상자에 대한 치밀한 모략공작이 실시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공개적인 당회의에서 그 사람의 과오를 비난,당적이나 직위를 박탈하는 수순으로 진행된다.

허가이의 숙청과정에 총대를 맨 인물은 같은 소련파의 박창옥이었다. 그는 소련에서 구역당 선전부장을 지낸 이론가로 이 당시에도 역시 당선전부장을 맡고 있었다. 박창옥의 음해공작은 이러했다.

박창옥은 어느날 당중앙부위원장인 허가이에게 회의에서 발표할 「특별원고」를 가져왔다. 이 원고는 김일성을 극찬하는 현란한 수식어로 가득차 있었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허가이는 『김일성 동지를 찬양하는 수식어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고 『일성 동지는 북조선에서 다 알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창옥은 『부위원장 동지가 필요없는 문구를 지워주면 수정하겠다』고 대답했다.

허가이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불필요한 미사여구에 붉은 줄을 그은 뒤 박창옥에게 원고를 돌려 주었다.

그러자 박창옥은 즉시 그 원고를 김일성에게 가지고 갔다. 그뒤 김일성은 허가이가 사무실로 찾아오자 책상서랍에서 이 원고를 꺼내 내보이며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뒤인 51년 11월1일 노동당 중앙위 4차 전원회의가 열리자 박창옥은 앞장서서 허가이를 맹렬히 공격했다.

○53년 의문의 권총자살

그는 당조직을 맡은 허가이가 신규당원을 모집할때 북조선 농민보다는 남조선출신 노동자를 우대했고 전쟁중 당원증을 잃어버린 당원을 무차별 추방ㆍ처벌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비난했다.

이로써 허가이는 당적을 박탈당하고 정치생명이 사실상 끝났으나 한동안 내각 부총리직을 계속 유지했다.

김일성은 허가이를 완전 거세하기 위해 전쟁으로 파괴된 순안댐 복구공사등 도저히 기한내 완수할 수 없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같은 압력을 견디다 못한 허가이는 53년 자신의 사무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으며 자연히 소련파는 와해됐다.

그러나 나는 허가이가 결코 자살이 아니라 타살됐다고 믿고 있다. 소련파가 제거되자 김일성의 다음 목표는 남로당과 연안파였다.

남로당파는 당중앙위 5차 전원회의가 열리기 두달전인 52년 10월 박헌영을 새 지도자로 옹립하기 위한 군사쿠데타를 음모했다는 죄목으로 사법상을 지낸 이승엽을 비롯한 12명이 체포됐다. 이 당시 남로당파는 남한에 침투시킬 유격대원을 양성하기 위해 금강정치학원이라는 군사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학교훈련생을 동원,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남로당 출신들은 하위 당원까지 모두 숙청을 당했다.

박헌영은 이때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55년 12월 ▲북한정부 전복 ▲미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 ▲남한내 민주세력 파괴 등 터무니없는 3가지 죄목을 쓰고 체포돼 비밀리에 처형됐다.

나는 남로당파의 숙청 내막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개요정도만 소개했다.

남로당파에 이은 연안파 숙청은 김일성에게 매우 힘겹고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김일성과 연안파의 대결은 56년 2월 열린 소련 공산당 20차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1인독재를 비판하고 레닌의 집단지도원칙을 내세운 여파였다.

북한에서 날로 강화되는 김일성 개인숭배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연안파는 소련의 스탈린 격하운동에 고무돼 조직적으로 김일성에 반기를 들었다.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한 불만은 연안파뿐 아니라 많은 고위지도자들 사이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연안파는 때마침 그해 8월에 당 중앙위 전원회의가 열릴 예정이어서 이 회의에서 개인숭배 문제를 공식 거론키로 하고 은밀히 이를 준비했다.

당시에는 중국 지원군이 완전 철수치 않고 남아 있었고 모스크바 주재 소련대사 이상조를 통해 소련측에서도 북한의 개인숭배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어 여러가지 여건이 연안파에 유리했다.

이러던 어느날 연안파의 총수인 김두봉은 같은 파인 최창익 부총리·윤공흠 상업상과 허가이 제거에 앞장선 박창옥을 만나 김일성 개인숭배에 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다. 이때 최창익은 박창옥에게 소련등 동구 9개국을 순방중인 김일성이 돌아오면 이 문제를 제기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창옥은 『나는 소련출신이어서 말하기 곤란하니 김두봉선생이 말씀하시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꼬리를 뺐다.

○당중앙위 수라장으로

김두봉은 이에 따라 김일성이 귀국하자 개인숭배문제를 시정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김일성은 듣는둥 마는둥 넘겨버렸다.

다음날 중앙위 전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 개막연설을 한 김일성은 그의 해외순방 결과를 장황히 설명했으나 소련에서 본 스탈린 격하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발언이 끝나자 상업상 윤공흠이 나서 김일성 우상화정책을 정면 공격했으나 김일성의 직계위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윤공흠에게 역공을 퍼부었다. 같은 연안파인 최창익이나 직업총연맹 위원장 서휘·전 내무성 부상 이필규 등이 윤공흠을 편들고 나섰으나 김일성 직계위원들의 욕설과 아우성에 밀렸고 회의장은 금세 수라장으로 변했다.

연안파의 반란은 실패했다. 이날의 회의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는가는 윤공흠,이필규,서휘,김강(선전성 부상) 등 연안파 4명이 이날 오전회의가 끝난 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그길로 중국으로 탈출해 버린 것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은 이필규의 승용차를 타고 압록강에 도착한 뒤 배를 빌려 중국으로 달아나 버렸다. 대세를 장악한 김일성은 그 다음날까지 계속된 전원회의에서 연안파등을 맹공격하고 김두봉은 연안파만을 감싸고 도는 분파주의적 행동을 했다고 비판을 받았다.

결국 김두봉은 58년 당에서 축출되고 집단 농장에서 병사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은 김일성 숙청사중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으며 광란의 숙청바람은 60년대 말까지,아니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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