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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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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2

입력
1990.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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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군 요청위해 박헌영과 북경으로/중국,스탈린과 상의 참전결정/소도 공군ㆍ대공무기 측면 지원/모택동ㆍ주은래ㆍ고강 등 만나 전황설명/인민군 군사전략에 대해 충고도 받아중국군의 6ㆍ25참전은 전세를 다시 한번 역전시키면서 이 전쟁을 본격적인 외세의 대리전으로 변화시켰다.

이제 한반도는 남북한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종주국들이 맞부닥친 국제전의 무대가 된 것이다.

6ㆍ25 남침계획을 수립했던 나는 중국 인민해방군 참전과정에도 개입했다.

나와 6ㆍ25의 인연은 참으로 기구한 것이었다.

국방군과 미군이 38선을 넘어 평양 바로 밑에 위치한 중화까지 진격했던 10월15일께 나는 갑자기 남일 총참모장의 호출명령을 받았다. 내가 찾아가자 남일은 『김일성이 만나잔다』며 평양 외곽에 있는 김일성의 지하벙커로 나를 데려갔다. 패전을 문책하려는 것으로 알고 내심 큰 걱정을 하면서 지하벙커에 도착해보니 외무상 박헌영이 이미 와 있었다. 김일성은 침통한 표정으로 제반정세를 설명한 뒤 박헌영과 나에게 중국정부에 「방조」(지원)을 요청하러 가라고 지시했다. 김일성은 우리의 방문 사실이 중국정부에 사전 통보됐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박헌영과 나는 그날밤 평양을 출발,신의주에서 중국어 통역을 맡을 신의주 인민위원회 위원장 유민과 합류한 뒤 10월18일 특별비행기편으로 북경에 갔다. 북경에 도착하자 중국측은 우리를 중국 인민해방군 제1부 참모장 여정인의 집으로 안내했다.

○이상조 통역으로 가세

여기서 유민은 돌아가고 당시 중국정부로부터 인민군의 겨울피복을 지원받기 위해 북경에 와 있던 이상조 상업성부상이 통역으로 가세했다.

우리는 다음날에야 중국지도부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자정이 막 지날무렵 중국 안내원이 『모택동 주석이 기다린다』며 급히 우리를 깨웠다.

안내인을 따라 중국공산당 정치국에 도착하자 여러명의 정치국원이 우리를 따뜻이 맞아 주었다. 지금 기억나는 인물은 모택동ㆍ주은래ㆍ고강ㆍ임표ㆍ팽덕회 등이다.

이들은 우리 일행과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자기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떼지 않았다. 이때 허리를 구부린채 지팡이를 짚은 주덕이 나타나자 전원이 기립,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중국지도부에서 원로 주덕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이때 처음 알게 됐다.

그제야 모택동이 박헌영에게 중국방문 이유를 설명토록 했다. 박헌영은 먼저 김일성의 안부를 전하고 근 1시간에 걸쳐 한반도정세를 설명한 뒤 중국측의 지원이 요청된다고 결론을 맺었다.

이어 내가 일어나 구체적인 전쟁상황을 설명하자 모택동은 중간에 나의 말을 가로막고 벽에 걸린 한반도 군사지도를 펼쳐보였다. 나는 그 지도를 보고 깜짝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북한을 떠나올때와 달리 지도에는 미군과 국방군이 이미 평양을 점령하고 한만국경 부근까지 진공한 것으로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비행기와 고사무기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말하고 발언을 마쳤다.

우리의 발언이 끝나자 모텍동은 먼저 정치국이 조선에 지원군을 파견키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모택동 자신감 보여

모택동은 이와 함께 『중국군 참전의 군사ㆍ정치적 의미를 조선인민들에게 잘 설명하라』고 당부한 뒤 조중연합군의 편성방법ㆍ통역원 배치ㆍ후방지원 문제 등의 광범위한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또 『중국지원군 사령관으로 팽덕회를 파견하고 후방지원은 고강이 맡기로 했다』며 『이 두 동지가 손을 잡으면 조선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날 회의가 지금도 내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이유는 모택동이 독특한 몸동작을 써가면서 인민군의 군사전략에 대해 여러 충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다리를 미군이라고 하고 다른 다리를 국방군이라고 하자. 처음에 국방군을 포위,섬멸한다면 미군은 맥을 추지 못할 것이다』라며 그 육중한 몸으로 한발을 들고 껑충껑충 뛰었다.

나는 모의 이런 행동이 바로 김일성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회의가 끝나자 모든 정치국원이 일어나 우리와 작별인사를 했으며 문밖까지 마중나온 주은래는 김일성에게 전달하라며 긴 봉투하나를 주었다.

나는 이날 회의 분위기로 보아 중국지도부가 한국전 참전(항미원조)에 적극적인 것으로 판단했으나 뒤에 고강을 통해 중국 지도부내에 심한 의견대립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고강은 만주일대에 자신에 충성하는 군대를 가진 일종의 군벌로 이로 인해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만주의 황제」라고 불리기도 했다.

고강은 우리와 함께 비행기로 심양으로 간 뒤 이곳에 있는 자신의 저택겸 사무실로 우리를 초대했다. 고강은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하면서 정치국내 파병찬성론과 반대론이 맞섰다고 전하고 소련의 개입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파병놓고 찬반대립

그는 자신이 정치국 회의에서 주장한 파병찬성론 발언요지를 박헌영에게 주어 읽게 했다. 그의 주장은 중국의 안보를 위해서도 지금 국경을 넘어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강에 의하면 파병 반대론은 주로 주은래가 주장했는데 그 논지는 중국이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인민해방군이 아직 정예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전쟁에 참가한다면 미국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의견이 팽팽히 대립,결론이 나지 않자 중국 정치국은 주은래를 스탈린에게 보내 이 문제를 상의토록 했다고 한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소련은 전쟁준비가 돼있지 않으므로 대신 중국이 조선을 지원하라』고 적극 권유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쟁가능성에 대해 『현재 미국은 아시아에서 큰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상황이며 더욱이 조선ㆍ중국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할 수 없다』고 단호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자 주은래는 중국이 지원군을 보내는 대신 소련은 미국의 중국공격에 대비,한만 국경일대에 공군과 대공무기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스탈린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소군 7만명 이르러

주은래는 이렇게 스탈린과 중국군 파견문제를 최종결정한 뒤 우리가 북경에 도착한 날 바로 돌아왔으며 주은래의 보고를 들은 뒤 우리를 만나느라 정치국 회의가 한밤중에 열린 것이다.

스탈린은 그뒤 포세드프 장군이 이끄는 3개 항공사단과 1개 고사포사단ㆍ1개 독립연대의 병력을 조중 국경에 파견,중국과의 약속을 지켰다. 이때 파견된 소련군은 최고 7만명에 이르렀으며 이들 중공군은 북한 영토까지 넘어와 작전을 벌임으로써 6ㆍ25에 직접 개입했다.

우리는 국경을 넘어 신의주로 들어올때 중국 인민해방군 선발대가 멀리서 국경을 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이를 보고 중국이 이미 오래전에 한국전 참전을 염두에 두고 군대를 국경일대에 집결해 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중국은 미국과 국방군이 38선을 넘는 순간 중국의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중국 지원군의 월경광경을 바라보고 있을때 박헌영이 『유동무』라고 부르며 말을 걸었다.

그는 『왜 저 군인들은 무기가 없소』라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 창밖을 자세히 내다보니 중국지원군은 4,5명이 한명꼴로 소총 한자루를 갖고 있었으며 그 소총도 낡은 일본총이었다.

나는 이내 이들이 채 무장을 갖추지 않은 선발대 임을 알아차리고 박헌영에게 『곧 무기가 나올 것』이라고 안심을 시켰다. 중국군은 군사장비를 실은 큰 수레를 앞에서 세 사람이 끌고 뒤에서 두 사람이 밀며 국경을 넘고 있었다. 중국군의 전력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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