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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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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0

입력
1990.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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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점령후 “전쟁 끝났다” 착각/승리 기쁨 들떠 진격 멈춰/저항 계속받자 남진 명령/장비 못갖춰 한강도하 준비만 하루 걸려/중앙청선 국방군 「북진공격지도」발견도6월28일 아침 탱크사단을 앞세운 제4사단이 마침내 서울에 입성했다는 보고를 받고 나는 『이제 전쟁이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같은 감격은 잠시 뿐이고 우리는 선제 타격작전의 치명적 허점을 발견하고 당혹해야 했다.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의 남침계획은 사흘안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나게 돼 있었다. 이러한 작전개념은 우리가 남한 전역을 장악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남한 수도를 점령하면 남한 전체가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같은 판단착오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적의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세계 전사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또한 우리는 일단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전역에 잠복해 있는 20만 남로당 당원이 봉기,남한정권을 전복시킬 것이라는 박헌영의 호언장담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남침 배경부분에서 언급했듯이 박헌영의 이 말은 김일성의 남침의지를 부추긴 주요 변수중 하나였으며 동시에 후일 김일성이 박헌영등 남로당파를 쓸어 버리는 구실이 됐다.

○남로당봉기 굳게 믿어

김일성은 지난 63년 장교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고 한다.

『미국놈의 고용 간첩인 박헌영은 남조선에 지하당원이 20만명이나 되고 이 가운데 서울에만 6만명이 있다고 떠벌였는데 20만명은 고사하고 우리가 낙동강 경계선에 진출할 때까지 단한건의 폭동도 없었다. 만약 부산에서 노동자들이 몇천명이라도 일어났더라면 우리는 반드시 부산까지 다 해방시켰을 것이고 미국놈들은 상륙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전쟁시나리오는 기초적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전선사령부는 서울 점령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등 남한 정부가 대전으로 이동하고 국방군의 항전이 계속된다는 보고를 받고 화급히 계속 남진하라는 명령을 제1보조지휘소 김웅 사령관에게 하달했다.

남진 명령은 강건 총참모장이 김일성과 직접 상의해 결정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전선사령부도 서울로 이동했다. 만약 이때 인민군이 쉬지않고 진격을 계속했다면 6ㆍ25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민군은 3일간 계속된 전투로 몹시 지친 상태였고 승리의 기쁨에 들떠 서울에서 멈춰 버렸다. 28일 하오 김웅 사령관은 민족보위상 최용건이 서울에 도착하자 중앙청에서 자축 파티를 벌이기까지 했다.

○중앙청서 자축파티도

나는 29일 전선사령부를 따라 난생 처음으로 서울땅을 밟게 됐다. 소련제 지프차를 타고 미아리고개를 넘어 시내로 들어오면서 나는 서울이 생각보다 발전된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다. 거리 여기 저기에 국방군이 설치한 진지나 방어물이 남아 있었고 건물들은 포격을 받아 일부 파손된 채였으나 대체로 전시도시답지 않게 온전한 모습이었다.

또 기대와는 달리 길가의 시민들은 우리를 보고도 무표정했으며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를 의아해하며 다소 기분이 상했지만 과거 조선총독부이며 그때는 남한 정부의 심장부인 중앙청에 들어서면서는 개선장군같은 환희를 맛보았다.

중앙청 지하실에 전선사령부를 설치한 뒤 나는 박길남 공병국장과 함께 우선 한강으로 달려갔다.

한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주도로인 한강 인도교는 이미 허리가 잘려져 있었다.

국방군은 인민군 선두 탱크부대가 미아리고개를 넘던 28일 새벽 2시께에 한강다리를 폭파해 버린 것이다. 이때 서울안에는 많은 국방군 병력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38선을 넘어 서울로 진격할 때 인민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다리에는 주민으로 가장한 유격대를 사전에 보내 국방군이 다리를 폭파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한강다리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할 수 없이 한강도하를 준비하고 국방군의 실수로 파괴되지 않은 한강철교에 철판ㆍ가마니 등을 깔아 탱크가 이동토록 했다. 당시 인민군은 부교등 대규모 도하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준비하는데 하루가 걸렸다.

○철판등 깔아 탱크 이동

우리가 이렇게 머뭇거리는 사이 국방군이 전열을 정비했는지 한강 맞은편에서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당초 작전계획에는 제2보조지휘소 부대가 28일까지 춘천ㆍ홍천ㆍ이천을 거쳐 수원에 도착,서울을 포위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이때 제2보조지휘소는 국방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홍천 부근에서 맴돌고 있었다.

나는 이들을 독려하기 위해 다시 춘천으로 내달았다. 제2지휘소는 7사단이 선두에 나서고 그 뒤를 따라 12사단이 진격해 갔다.

나는 직접 전선시찰에 나갔다가 어느 산아래에서 7사단 병사들이 피곤해 잠을 자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들은 며칠밤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진격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피곤한 것은 당연했다.

맨땅에 그대로 쓰러져 잠을 자고 있는 병사들을 보면서 나는 화가 나기 보다는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7사단을 뒤로 빼고 12사단을 선봉에 내세웠다.

○포탄맞아 목숨 잃을뻔

이같은 사단교체작업을 지켜보다가 나는 아슬아슬하게 생명의 고비를 넘긴 일이 있었다. 당시 12사단장 최충국 대좌,12사단 포병부 사령관 최아립 중좌 등과 함께 사단장 지프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국방군의 박격포탄세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는 황급히 차를 세우고 뛰어내렸으나 최충국은 마지막으로 내리려다 그만 포탄에 직격당했다.

최충국은 양다리 부분을 포탄에 맞아 하복부를 구분할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나는 피범벅이 된 최충국을 다른 지프차에 싣고 후방병원으로 달렸으나 그는 후송중간에 숨을 거두었다.

당시 혼수상태에 빠진 최충국은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 어떤 여자의 이름만을 계속 중얼거렸다. 부하들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최충국의 부인 이름이었다.

나는 6ㆍ25를 회상할 때면 먼저 최충국의 최후 모습이 떠올라 항상 마음이 우울해지곤 한다.

그는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88여단에서 나와 동고동락했던 동지이자 친구였다.

김일성 대대가 아닌 중국인 대대에 속해 있었지만 그는 김일성과도 가까웠다. 이처럼 확고한 투쟁경력을 가진 그가 생명이 꺼져가면서 부른 것은 『인민군 만세』나 『조국해방 만세』가 아니라 그의 부인 이름 석자였다.

○전술상 호기 놓쳐버려

나는 그의 최후를 지켜보면서 전쟁속에서 한 개인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됐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 비극적 전쟁에서 희생된 수많은 원혼들의 절규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솟구치는 슬픔을 억누르면서 그의 시신을 직접 평양까지 운구한 뒤 나는 다시 서울로 내려왔다. 그것이 내가 죽은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우정의 표시였다.

아무튼 이같은 상황속에서 인민군은 이틀간이나 서울에 머무름으로써 전술상의 호기를 스스로 놓쳐 버렸다.

그런데 중앙청에 전선사령부를 차린 우리는 한 금고속에서 국방군이 북한을 공격하는 내용을 담은 한장의 지도를 발견했다.

이것은 지도위에 군대의 이동방향만을 대충 표시한 엉성한 것이었지만 서울과 춘천 방향에서 국방군이 38선을 넘는 것으로 그려져 있었다.

나는 이 지도가 남한이 북한의 공격을 받을 경우 이를 격퇴하는 것을 표시한 것인지,아니면 진짜 북침을 계획한 것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같은 작전계획이 군내부에서 사전에 세워져 있을 법도 했다.

어쨌든 이 지도는 지금도 북한에서 북침을 주장하는 근거자료로 선전되고 있다.<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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