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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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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9

입력
1990.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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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위장 23일 병력이동 완료/평양 서포동굴에 전선사령부/동원 인민군 10만… 승전보 계속/동부 산악지선 탱크 발묶여 진격지연/개전직전 참모장 해임등 내부 혼선도50년 6월25일 일요일의 여명이 밝아오던 새벽 4시. 38선 전역에 집결해 있던 북한인민군의 중화기는 일제히 남쪽을 향해 불을 뿜었다. 선제타격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이 이 시간을 작전개시점으로 잡은 이유는 물론 장병의 외출·외박과 경계소홀 등으로 남한국방군의 전투역량이 최저수준인 때이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인민군은 23일까지 전투부대를 38선 일대에 집결해 놓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대규모의 병력이동을 훈련으로 은폐하기 위해 특히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가짜 기동훈련계획을 평소와 달리 암호문이 아닌 평문으로 유선 하달하고 훈련평가서를 역시 평문으로 유선보고하게 했다. 심지어 어느 부대는 훈련을 잘해서 포상하고 어떤 부대는 훈련 기강이 문란,처벌한다는 내용까지도 있었다. 남측이 이러한 전문교환 내용을 도청했을 것은 물론이다.

인민군 최고사령관인 김일성은 전쟁을 총괄,지휘할 전선사령부를 구성했다.

전선사령관은 서열이나 직책상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이 임명되는 게 당연했으나 당시 최용건은 김일성과 사이가 좋지 않아 김책이 맡았다. 최용건은 김일성과 남침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들어 전면전쟁에는 반대했다고 한다.

김책은 전선사령관이 되긴 했으나 정치위원 같은 역할을 하며 후방지원문제를 전담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총참모장 강건이 전쟁을 직접 지휘했다. 나는 전선사령부가 구성되면서 소장으로 승진했다.

전선사령부 산하에는 제1보조지휘소(1군단) 제2보조지휘소(2군단)가 설치돼 각각 서부와 동부전선을 맡았다.

제1보조지휘소 사령관은 조선의용군 출신의 연안파 김웅 중장으로 그는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전술과 지략이 뛰어난 지장이었다. 제2 보조지휘소 사령관도 역시 연안파인 무정중장이 임명됐다.

두 보조지휘소는 황해도 금천과 강원도 화천에 본부를 차렸다.

1보조지휘소에는 제1·2·3·4·6 사단과 105탱크 사단이 배속되고 제2보조지휘소에는 7·12사단,기계화연대가 배치됐다.

인민군은 원래 연대단위로 편성됐으나 6·25직전 사단으로 증편됐으며 내무성산하 국방경비대도 인민군에 편입됐다.

지상포 사격으로 전쟁의 신호탄을 쏴 올린 인민군은 탱크부대를 앞세우고 일시에 38선을 돌파,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주공부대인 제1지휘소 예하부대는 해주,개성,연천등을 통해 서울로 향해 진격했고 제2지휘소는 춘천방면을 거쳐 수원을 향해 돌격했다. 전쟁에 동원된 인민군 총병력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10만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침잠에서 미처 깨어나기도 전에 전면적인 기습을 당한 남한 국방군은 예상했던것 이상으로 어이없이 무너졌다.

인민군은 동부전선에서 국방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주춤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별다른 저항없이 서울 근교까지 노도처럼 밀고 내려갔다.

특히 이 과정에서 소련제 T34탱크가 보여준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국방군은 처음보는 소련제탱크에 기가 질려 속수무책으로 후퇴를 거듭했다. 105탱크 사단은 이때까지만 해도 1개연대로 이뤄진 여단이었으나 서울을 점령한뒤 소련으로부터 탱크를 더 지원받아 사단으로 확대됐다. 사단장은 88여단에서 소대장으로 활동했던 빨치산 출신의 유경수 소장이었다.

한편 개전당시 전선사령부는 평양에서 가까운 서포 천연동굴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일제시대 일본군 화약창고로 사용됐던 이 동굴안에서 전선으로부터 들어오는 전황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곳에는 나 외에도 사령관 김책,참모장 강건,군사위원 김일 등 사령부 수뇌부가 숨을 죽이며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25일 상오 9시 우리는 인민군이 개성을 해방했다는 첫 전문보고를 받았다.

동굴안에는 순간 『와』하는 함성이 터졌고 우리는 서로 껴안으며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다.

6·25초기의 구체적인 전황은 자료나 문헌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개전당시 인민군은 각 전선에서 쉽게 승리를 거듭하기는 했으나 적지않은 내부혼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 예로 제1 보조지휘소는 참모장이 없이 전쟁에 돌입했다. 참모장이었던 황성복 소장이 전쟁 개시 수시간전인 24일밤 해임됐기 때문이다.

황성복은 소련에서 사관학교를 나온 전통파 군인으로 인민군총참모부에 있다가 6월중순 제1보조지휘소 참모장에 임명됐다.

그런데 황성복은 24일 낮 제1보조지휘소 사령관 김웅중장이 작전지도를 가지고 어디론가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한바탕 소동이 일게했다.

황성복은 당황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보고하고 김웅중장을 의심하는 듯한 말을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반신반의 했으나 워낙 중대한 사안인 만큼 총참모장 강건을 찾아 전화로 보고했다. 이때 강건은 남침준비를 최종 보고하기 위해 김일성의 관사에 있었고 자연히 김일성도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때문에 전선사령부가 발칵 뒤집혔으나 김웅은 수시간만에 버젓이 나타났다. 그는 사라진게 아니라 전선 시찰을 나갔던것 뿐이며 비밀유지를 위해 시찰사실을 참모장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린 김일성은 상관을 의심,호들갑을 떤 황성복을 그자리에서 해임시켰다.

또 하나 기억나는 일화는 1사단장 최광소장이 총살을 당할 뻔한 일이다.

1사단은 개전후 문산을 통해 의정부로 진격해 내려갔다. 그런데 도중에 통신망이 고장나 사단본부와 예하부대간에 통신이 두절됨으로써 일선부대가 혼란에 빠져 버렸다. 또 26일 새벽에는 의정부 북방에 설치한 무기보관소가 폭발,저녁 무렵까지 계속터지는 바람에 인민군의 이동이 한동안 지연되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알고 격노한 김일성은 1사단을 후방에 있던 4사단으로 교체하고 최광을 총살토록 명령했다.

김일성이 만주 항일동북연군과 소련 88여단에서 부하로 데리고 있던 최광에게 총살명령을 내린 사실은 당시 그가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최광에 대한 총살명령은 전선사령관 김책이 김일성을 찾아가 선처를 호소함으로써 곧 취소됐다.

1사단과 교체된 4사단은 그후 뛰어난 전공을 세워 김일성의 근위사단이란 칭호를 받았다.

이런 일외에도 동부전선에서는 작전상 중대한 차질이 있었다.

당초 작전계획은 제2보조지휘소 예하부대가 춘천 홍천을 거쳐 3일안에 서울 이남을 포위 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제2보조지휘소 주력부대는 27일 저녁에야 춘천을 점령할 만큼 이동이 지연됐다.

그 주된 이유는 빨치산 출신인 전문섭 대좌가 지휘하는 경탱크부대가 험난한 산악지형으로 인해 발이 묶였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지형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소련군 고문관들이 남침계획을 성안했기 때문에 발생한 어처구니 없는 실수이다. 소련군 고문들은 이 점이 문제돼 그뒤 본국으로 소환을 당했다.

또 춘천일대에서 국방군 6사단이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분전한 것도 인민군의 순조로운 진격을 방해한 요인이 됐다.

이같은 착오는 있었지만 주력부대는 예정대로 만 3일만인 28일아침 서울을 완전 점령했다. 만약 동부전선의 상황이 보다 순조로웠다면 서울은 28일 이전에 함락됐을 것이다.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했을 때 『최후의 순간까지 서울을 지키겠다』고 장담한 이승만 대통령은 한강철교를 폭파해 버리고 달아나버린 뒤였다.<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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