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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춘추,히로히토 「회고록」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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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춘추,히로히토 「회고록」공개

입력
1990.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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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군 쿠데타 우려 태평양전 못막아”/중국과 전쟁 저지도 군부반대로 무산/국가ㆍ민족보호 위해 「무조건 항복」결심/「면책론」주장… 피해국 반발 소지지난해 작고한 히로히토(유인) 일왕이 『군부의 쿠데타가 두려워 태평양전쟁 도발을 막지 못했다』고 생전에 자신의 면책을 주장한 기록이 공개됐다.

이 회고록은 일본의 패전 이듬해인 1946년 봄 그가 측근들에게 5차례 총 8시간에 걸쳐 술회한 것을 데라사키(사기영성ㆍ작고)라는 궁내청 소속 통역관이 속기한 것으로,미국에 사는 데라사키의 딸이 최근 「문예춘추」지에 공개했다.

일본 매스컴들은 1946년 봄이 연합국의 2차대전 전범재판(동경재판)을 앞둔 시점이어서 히로히토 일왕이 담담한 심경으로 지난시대의 중대사를 회고한 이 기록의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흥분하고 있으나 일부 면책론 때문에 주변국으로부터 비판이 일 소지가 큰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우리에게 관심 있는 사건들에 대한 회고록의 요지이다.

▷태평양전쟁 개전결정◁

내가 젊었던 그때(1941년) 주전론을 억눌렀더라면 오랫동안(훈련을) 연마한 육군과 해군의 정예군이 미국에 호락호락 굴복한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고,국내의 여론은 반드시 비등해 쿠데타가 일어났을 것이다. 실로 어려운 시기였다.

그해 봄 이른바 최후통첩이 왔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도 최후의 단계로 접어들었었다.

▷전쟁의 원인◁

제1차 세계대전후의 평화조약의 내용에 전쟁의 원인이 숨어 있다. 일본이 주장한 인종평등안을 열국들이 용인하지 않아 황백의 차별은 계속 존재했는데 캘리포니아 이민거부 같은 일은 일본국민을 분개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국민적 분개를 배경으로 일단 군이 들고 일어났으니 억누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일전쟁◁

일본과 중국의 대립이 첨예화,일촉즉발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해서든 장개석과 타협하려고 스기야마(삼산원) 육군 대신과 참모총장을 불렀다. 육군의 의견이 나와 같으면 타협시키려 했으나 장래에 대한 두사람의 전망은 『천진에서 일격을 가하면 사건은 1개월 안에 끝난다』는 것이었다. 이런 위기속에 노구교사건이 일어나 상해로 비화된 것이다.

▷도조히데키(동조영기) 인물평◁

원래 그는 말하면 알아듣는 사람이었는데 압제가란 평판이 난 것은 너무 많은 직책을 갖고 있어 바빴기 때문에 본인의 생각이 밑에까지 전해지지 않았고 헌병을 너무 많이 동원한 때문이다.

개전 당시 총리로서 그는 일을 열심히 했고 평소 말하는 것도 사려가 깊었으며 장점도 많았다. 사무적으로는 좋았지만 민의를 알아… (기록결락) 특히 인텔리층의 의향을 살피지 못했다.

▷45년 8월14일 어전회의◁

(무조건 항복 여부로) 의견이 분열돼 있는 동안 미국은 비행기로 선전삐라를 살포하기 시작했다.

이 삐라가 군대나 일반의 손에 들어간다면 쿠데타가 일어날 것은 필연이었다. 거기서 나는 묘의의 결정이 조금이라도 빠르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내 결심은 첫째 이대로는 일본 민족은 망하고 말 것이며 나는 백성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나는 내 일신을 희생해서라도 강화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오키나와 결전의 패인◁

그것은 육ㆍ해군의 작전불일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키나와는 원래 3개사단으로 방어해야 할 곳이었는데 나도 걱정했다.

소위 특공작전이란 것도 해보았으나 날씨가 나쁘고 탄약도 없고 비행기도 좋은 것이 없고…. 만일 날씨가 좋았다 해도 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공작전이란 것은 실로 정에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무리였다.

▷장작림 폭살◁

이 사건으로 다나카(전중의일) 총리를 「젊은 패기 탓」이라고 질책했는데 들리는 바로는 『군법회의를 열어 문책하면 (주모자인) 고모토(하본) 대좌가 일본의 모략을 모두 폭로하겠다』고 해서 군법회의가 중지됐다는 것이었다.<동경=문창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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