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인민군 작전국장으로 전보/「보안대대 본부」가 인민군 모체/김일성 처 김성애는 타자수 출신/민족보위성 안전부 근무중 김눈에 들어/첫부인은 한성희… “여성편력” 잘 알려져김일성이 권력을 향해 줄담음치고 있던 45년말과 46년초 나는 소련 군정에서 일하게돼 자연히 김일성과 대면할 기회도 적어졌다.

46년 여름 어느날 나는 모처럼 김일성의 호출을 받았다. 이때 김일성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정권수립에 막바지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비서였던 나의 친구 문일은 내가 있던 평남 경비사령부로 전화를 걸어 『김일성과 같이 갈 곳이 있으니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했다.

얼마후 문일을 대동하고 사복차림으로 나를 찾아온 김일성은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뒤 그가 타고온 소련제 승용차에 오르도록 했다.

우리를 태운 승용차가 평양을 빠져나가 1시간여를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은 평양과 남포의 중간지점인 대안리에 있는 인민군 보안간부학교였다. 이 학교는 인민군 창설을 위해 군관들을 양성하는 곳으로 내가 갔을때 막 개교를 서두르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교장 박효삼 대좌(대령 및 준장급) 부교장 박성철 중좌(중령)가 마중을 나왔다. 박효삼은 연안파로 38년 중국 화북지방에서 조직돼 항일투쟁을 벌였던 「조선의용군」 지대장과 참모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부교장 박성철은 지금의 북한 부주석이며,나와 함께 88여단에 있었던 박길남도 중좌로 사격학 주임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은 1시간 정도 담소를 나눈뒤 『유가이(나를 지칭)를 부탁한다』고 박효삼에게 당부하고 돌아갔다.

나는 전술학 주임으로 임명됐으며 처음으로 중좌계급을 부여받았다.

보안 간부학교는 전술ㆍ사격ㆍ통신 등 3개 학부로 나눠졌는데 전술ㆍ사격학부에 각 1백20명,통신학부에 60명 등 3백여명의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교육기간은 1년으로 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인민군 소대장으로 임명됐으며 가장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중대장으로 특채됐다.

당시 우리는 독자적 교재가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 학습교재를 번역해 사용했다. 해방직후 북한에 군대가 필요하게 되자 김일성은 소련의 양해를 얻어 46년초 88여단 출신들을 중심으로 북한 인민군의 모체인 「보안대대본부」를 창설했다. 이때 남한에서도 국방경비대가 조직되고 있었다. 보안대대 본부는 최용건이 책임자로 산하에 훈련ㆍ항공ㆍ문화ㆍ포병부가 있었다. 정치사업을 담당하는 문화부장은 동북항일연군과 88여단에서 김일성의 직계 부하였던 김일이었고 포병부장은 중국 팔로군 포병사령관을 지낸 무정이 맡았다.

이 보안대대본부는 48년 2월8일 조선인민군으로 정식 출범했으며 역시 최용건이 국방장관 격인 초대 민족보위상에 취임,김일성 정권의 방패역할을 했다.

여기서 북한의 역사왜곡에 대해 또 한마디 해야겠다.

북한은 2월8일을 인민군 창건기념일로 축하해왔으나 70년대말부터는 갑자기 인민군이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을 하던 32년 4월25일 남만주에서 이미 창건됐다고 주장하면서 기념식 날짜를 4월25일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나는 88여단이나 북한에서 생활할 때 김일성이 만주에서 인민군을 조직했다는 말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다시 이야기를 뒤로 돌려 나는 보안간부학교에서 48년 9월 인민군 작전국장으로 임명될때까지 2년여 동안을 근무했다. 그 사이에 나는 2번 보직이 변경됐으나 그때마다 보안간부학교에 파견된 소련군 고문관들이 반대해 다시 학교로 돌아오곤 했다.

한번은 민족보위성 정찰국장으로 전보됐다가 3일만에 돌아왔고 그뒤 역시 민족보위성 안전부장으로 하루 근무하다 또 학교로 불려왔다.

이는 순전히 소련군 고문이 내가 학교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항의했기 때문인데 나는 이때 소련군이 내게 보인 호의적인 자세가 김일성의 심기를 자극,그뒤 내가 숙청 당하는 발단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근런데 나는 민족보위성 안전부장으로 하루동안 근무할 때 김일성의 현재 부인인 김성애를 처음 보게 됐다.

당시 김성애는 안전부 부부장 김성국의 타자수로 일했고 이름은 김성팔(나는 그녀가 언제,왜 이름을 바꿨는지는 알지 못한다)이었다. 그녀는 빼어난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귀엽고 특히 애교가 많았다.

내가 부장으로 부임하던날 그녀가 잘익은 군고구마를 가져와 권하던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녀의 상관인 김성국 역시 만주에서부터 김일성과 행동을 함께해온 심복중 한명이다.

어느날 김일성이 김성국의 사무실을 불시 방문,이야기를 나누던중 옆에서 타자를 치던 김성애를 발견하고 한동안 시선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김일성이 돌아간 다음날 그의 부관이 김성국에게 전화를 걸어 『수상 동지가 타자수를 구하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눈치가 빠른 김성국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고 곧 김성애를 김일성의 비서로 올려보냈다. 이것이 김성애가 김일성의 세번째 부인이 된 숨은 비화이다.

말이 나온김에 내가 알거나 혹은 전해들은 김일성의 여자관계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다.

김일성이 김성애를 만날 당시 그의 부인은 김정숙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김정숙은 88여단에서 김일성과 결혼,정일(소련명 유라)ㆍ평일(소련명 슈라) 등 두아들을 낳았고 북한에 돌아온 직후 딸 경희(소련명 애라)를 출산했다. 둘째아들 평일은 4살때인 48년 김일성 관사에 있는 연못에서 놀다가 빠져 죽었다.

그뒤 김일성과 김성애 사이에 난 4명의 아들중 장남 이름도 평일(현 불가리아대사)인데 죽은 슈라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김일성의 여성편력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만주와 소련을 떠돌며 엄격한 규율 속에서 생활하다 북한에 돌아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된 김일성은 그동안 억제해온 욕구를 분출하듯 여자관계가 문란했다.

김일성은 김성애 외에도 한 인민군 고급군관의 부인을 농락하고 그 군관을 소련으로 유학보낸 일도 있으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할때는 위원회에서 일하던 오찬복이란 타자수에게 키스를 하려다 빰을 맞은 적도 있었다.

김일성은 그의 엽색행각이 부하들 사이에서도 불만을 사게되자 1호ㆍ2호 등 일련 번호가 붙은 비밀저택을 곳곳에 마련하고 아리따운 처녀들을 불러들여 은밀히 즐기기도 했다. 이 저택의 관리도 지난회에 이야기한 이동화가 맡았다. 즉 이동화는 김일성의 채홍사였던 것이다.

이렇게 김일성의 여자관계가 문란해지자 부인 김정숙과의 관계도 좋을리가 없었다. 김정숙은 49년 네번째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만주에서 김일성의 동지로,88여단에서는 그의 부인으로 고난을 함께 해왔지만 영화는 누려보지도 못하고 불행한 죽음을 당했다.

내가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김일성의 첫번째 부인은 한성희란 여인으로 30년대 만주 항일동북연군에서 부녀청년부장으로 활약하다 김일성과 진중 결혼을 했다.

그러나 한성희는 39년 일본 토벌대에 체포돼 그뒤 소식이 끊어졌다.

김일성은 북한에 돌아온 뒤 곧 한성희의 행방부터 수소문했고 그녀 고향인 강원도에 빨치산 출신 부하를 보내 찾아보도록 했다.

마침내 47년 김일성은 한영숙이란 새이름으로 강원도 여성동맹 부위원장을 맡고있던 한성희를 찾아냈다.

한성희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국내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났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 더이상 항일투쟁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 경찰의 강권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향에서 개가를 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귀국을 알고도 찾지않았던 모양이다.

7년여만에 감격적으로 재회한 두사람은 그후 한동안 계속 만났으나 김일성이 김성애와 가까워지면서 다시 관계가 끊어졌다고 한다.

내가 알기로는 김일성과 김성애는 공식적인 결혼식은 하지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이야기가 빗나갔지만 어쨌든 나는 보안간부학교에서 전술주임을 거쳐 48년 군사담당 부교장으로 승진하면서 계급도 대좌로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인민군 작전국장으로 전보됐으며 이 인사로 나는 우리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되고 만다.<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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