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할머니는 처음부터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단풍구경을 하러온 행락객 때문인지 호텔방을 구할 수가 없어 나와 통역안내인은 아침밥만 먹여주는 민박을 하게 됐다.밤 11시 넘어 도착한 우리는 이내 따발총 같은 수다에 그로기상태가 되고 말았다. 왕수다 할머니(이름은 알지만 왕수다라고 해두자)는 짐을 풀 시간도 주지 않고 우리를 세워둔채 미국의 인상이 어떠냐,언제까지 미국에 있을거냐,뉴욕에선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느냐고 숨가쁘게 물어왔다.
나는 따발총같이 말이 빠른 우리나라 여자 코미디언을 구경하는 기분이었으나 내말을 통역하면서 일일이 말대꾸를 해줘야 하는 안내인은 죽을 지경이었다. 왕수다 할머니는 주말에 단풍구경을 하러 가겠노라고 하자 『가긴 뭘가. 여기서 내다보면 되지』하고 단칼에 우리를 작살내 버렸다.
빨리 씻고 자고 싶었던 우리는 제발 좀 그만해 주기를 바랐지만 왕수다 할머니는 보스턴지도를 갖고 와 일일이 설명을 해주고야 우리를 놓아 주었다.
다음날 아침 집주위를 둘러보니 왕수다 할머니의 말대로 단풍구경은 멀리 갈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붉고 노란 잎의 나무가 집주위를 단풍등처럼 밝게 해주고,바람이 불거나 안 불거나 낙엽눈,낙엽비가 내리고 있었다.
왕수다 할머니는 60이 넘은 사회사업가(Social Worker)로 1남2녀를 분가시키고 2년전 이혼한 뒤부터 혼자사는 사람이다. 사회복지활동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나가서는 밤늦게 들어오는데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어도 새끼에 새끼를 치고 가지에 가지가 뻗는 그놈의 수다가 겁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에도 『오늘 무엇을 했느냐』고 인사치레로 한마디 던졌더니 기다렸다는 듯 수다가 터져나왔다.
왕수다 할머니의 유일한 가족은 열한살이 넘어 할머니만큼 늙어버린 암컷 세퍼드. 이름이 캐시미어라는 이 개는 진종일 혼자 집안에서 고독을 씹다가 우리가 저녁에 들어가면 달려들어 핥고 방에까지 쫓아들어오곤 했다.
지겨운 수다를 피해 예정의 절반인 이틀밤만 자고 도망치듯 떠날때 우리는 주말이 되어 어머니를 찾아오는 왕수다 할머니의 아들과 집앞에서 마주쳤다.
그 아들은 자동차로 10분 정도의 거리에서 가게를 경영하고 있다. 왕수다 할머니는 아들이 집안으로 들어가자마자 『5분 정도 앉아있다가 또 가버릴 녀석』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왕수다 할머니는 수다때문에 다 늙어서 이혼을 하게 됐고 고독하기 때문에 더욱 수다쟁이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수다 할머니와 덩달아 외로운 할머니의 개가 안쓰럽고 말년이 쓸쓸한 미국 노인들이 가여웠다.<보스턴에서>보스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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