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초 설치… 12ㆍ12후 “악명”/울창한 숲 위장… 운동권 프락치 강요도일명 「빙고호텔」로 불리면서 혹독한 고문수사와 정치사찰의 본거지로 재야와 운동권인사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보안사 서빙고분실이 보안사 민간인사찰 파문의 여파로 문을 닫게 됐다.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언덕에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울창한 숲에 싸여있는 서빙고분실의 정식명칭은 「국군보안사 대공처6과」. 바로 이번 대민사찰의 진원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지난 70년대 초반에 문을 열어 최근까지 각종 시국사건과 간첩단사건에 대한 공작 및 수사를 해오면서 치안본부 대공분실과 안기부를 능가하는 악명을 떨쳐 왔다.
특히 79년 12ㆍ12사태 이후 보안사가 합수부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를 연행,협박ㆍ회유ㆍ고문하는 공포의 장소로 이용돼 왔다.
서빙고분실은 직제상으로는 간첩사건 등 대공수사업무만을 담당하는 일개과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번 폭로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야당정치인 재야인사 노동운동가 종교인 대학교수 언론인 문화계인사는 물론 집권당의 대표최고위원까지 사찰대상으로 하는 특수업무를 수행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서빙고분실은 정보의 수집ㆍ기록ㆍ관리,대학과 재야운동권의 동향파악,일반 대공업무,상부의 특명사건을 전담하는 4개부서가 있고 각 부서마다 15∼20년씩 근무한 준위나 하사관 문관 등 10명 내외의 요원이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공시절 이곳에서는 많은 간첩단사건이나 좌경조직사건을 적발,조사해 왔다.
그러나 조사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법정에서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거짓 진술했으며 사건이 조작됐다고 폭로함으로써 사건조작의 의혹이 강하게 제기돼온 것이 사실이다.
서빙고분실이 최초로 일반인에게 공포의 장소로 알려지게 된 것은 지난 73년 4월 남산 야외음악당 사건때였다.
당시 박형규ㆍ나상기씨 등 종교계 재야인사 학생등이 박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뿌리며 남산 야외음악당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다 전원 이곳으로 연행돼 1주일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서빙고분실의 강압수사 실상은 연세대에 유학중 지난 83년 간첩혐의로 연행됐다가 대공수사관으로 특채돼 2년여동안 근무했던 재일동포 김병진씨가 86년 2월 일본으로 탈출한 뒤 「보안사」라는 제목의 수기를 써 폭로함으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보안사의 가혹한 고문수사는 창군 당시부터 일제시대때 악독한 고문을 일삼았던 고등계형사들이 군수사요원으로 대거 수용된데다 수많은 대공수사를 해오는 과정에서 『간첩은 아무리 심한 고문을 해도 괜찮다』는 인식이 수사요원 사이에 일반화 돼 있었고 이같은 수사관행을 저지하기 힘든 군부대의 특수사정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공시절 운동권 출신 사병의 의문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주장되는 녹화사업도 서빙고분실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의식화사병을 개조한다는 이 녹화사업은 원래 대공처의 심사과에서 담당했으나 심사과가 폐지된 뒤에는 서빙고분실에서 담당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녹화사업대상 사병들은 서빙고분실에 연행돼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협박과 회유를 받아 운동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락치활동을 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윤석양이병이 이같은 대표적 사례지만 심한 양심의 가책으로 번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현재의 서빙고분실을 연내에 폐쇄한 뒤 민간에 매각하거나 다른 군부대 시설로 전용 또는 보안사 부속건물로 계속 유지하면서 현재의 기능은 중단하는 방안 등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빙고분실 폐쇄에 대해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여론이 많으나 분실폐쇄만으로 민간인 사찰 등의 월권행위가 근절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많다.
이미 위치가 일반에 너무 알려져 있어 위치보안이 중요한 보안부대의 건물로는 부적당해 이를 폐쇄함으로써 생색만을 낸 조치로도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서빙고분실 폐쇄가 고문수사와 민간인사찰 등 보안사의 불법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조치가 되기 위해서는 보안사분실 제도의 개선과 요원들의 의식개혁 등 확고한 보안사 업무개선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이계성기자>이계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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