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로 자원 풍부… 70년대도 한차례 격론/일 군국주의 부활 우려 중국대만 공동대응디아오유타이(조어대)군도인가,센카쿠(첨각)제도인가.
동지나해의 작은 무인도들을 둘러싼 일본대만간의 해묵은 영유권 분쟁이 최근 다시 재연,중국 일본 두 나라 민족간의 감정적 싸움으로 비화되고 있다.
대만 국영TV는 21일 일본 해상자위대가 대만 운동선수들과 정치인을 태우고 양국간의 영유권 분쟁이 일고 있는 디아오유타이군도(일본명 센카쿠제도)로 항진중이던 대만 어선들의 열도접근을 저지했다고 보도했다.
이들 대만 어선들은 디아오유타이군도에 대한 대만의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운동선수와 관리,정치인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태우고 이날 아침 대만을 출발했으며 이들 대표단은 이 군도에 대만국기를 게양하고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봉송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만 대표단은 헬기와 제트기의 지원을 받은 일본 해상자위대의 함정 10여척이 디아오유타이군도 5해리밖 지점에서 봉쇄망을 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단」 선수를 돌려야 했다.
대만에서 북쪽으로 2백여㎞ 떨어진 디아오유타이군도는 무인도들로 이뤄져 있으나 석유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70년대에 일본대만간에 한차례 영토분쟁이 있었던 이곳에 또 다시 분쟁이 재연되면서 중국측도 대만에 가세,이제는 양 민족간의 싸움으로 확대되기에 이른 것이다.
70년대 이후 잠잠했던 이 문제에 새로운 논쟁의 불을 당긴 것은 일본 국내 극우단체인 「일본청년사」.
지난 9월 이 단체는 12년전 자신들이 「센카쿠시마(첨각도)」에 설치했다가 일이 시끄러워지자 방치해 왔던 등대를 복구,「정식 항선표지」로 승인해 줄 것을 일본 정부 당국에 신청했다.
이에 일 해상보안청은 지난 9월29일 「승인방침」을 공식화 했고 이것은 곧바로 대만ㆍ홍콩의 언론기관 학자 민간단체들 사이에 거센 항의와 함께 「조어대 주권수호운동」의 불을 당겼다.
대일 항의가 격화되는 속에 대북과 북경의 외교부는 각각 지난 18일 같은날 약속이라도 한듯 조어대군도의 중국영토권에 대한 어떤 침범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내용의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외무성도 다음날인 19일 즉각 대북과 북경 정부의 영유권 주장을 일축하고 일본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센카쿠제도」의 영유권을 지키겠다고 역시 단호한 입장을 밝힌 끝에 21일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
지리적으로 보면 조어대군도(센카쿠제도)는 대만 북단의 기륭시에서 북동쪽으로 1백20해리,일본의 유구(오키나와)열도로 부터는 가장 가까운 곳이 2백해리가 떨어져 있어 분명히 대만쪽에 더 가깝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일본이 1879년 유구열도를 점령한 후에도 조어대군도는 분명히 청조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하관)조약에 따라 대만섬이 일본에 할양된 후 일본은 그 다음해 「명치칙령」을 통해 센카쿠제도(조어대군도)를 대만섬에서 분리,오키나와현에 귀속시켰다.
패전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 당국은 대만섬을 중국에 반환하면서도 「센카쿠제도」는 오키나와현에 귀속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이를 반환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미국의 「실수」는 72년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때도 시정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 「불필요한 영유권 분쟁」의 불씨가 됐다는 것이 중국과 대만의 주장.
이에 따라 지난 70년대초 일단의 대만 학생들이 이 섬에 대만국기를 꽂자 바로 며칠 뒤 일본 해상자위대 병력이 상륙,이를 제거한 이른바 「국기사건」과 78년 극우단체 일본청년사의 등대건설 사건때 영유권 논쟁의 과열과 함께 각지 화교들의 조어대 주권수호운동이 벌어졌다.
다만 이번에는 최근 자위대 해외파병등 일본내 군국주의의 부활움직임이 우려되는 가운데 극우 청년단체가 센카쿠 영유권 주장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과거에 비해 훨씬 큰 경계심이 논쟁을 증폭시키고 있다.
특히 이번에는 대북과 함께 북경정부가 직접 개입,이 문제에 관한한 민족적 이해를 바탕으로 공동 대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홍콩=유주석특파원>홍콩=유주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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