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축구가 서울에 왔다. 북에서 낯을 익힌 선수들끼리 반기는 모습을 보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름답고 유쾌하다. 역시 만나야 한다. 거북한 상대일수록 더욱 그러하다.엇비슷한 시기에 세 갈래로 평양방문이 이뤄졌다. 축구선수단이 북경에서 비행기로,음악인들은 육로를 거쳐 판문점을 넘어갔다. 총리회담 대표들도 같은 길을 거쳐 북한땅을 밟았다. 그 사이에 평양의 모습은 우리 눈에 제법 익숙해졌다. 보도내용과 사진을 보며 화제가 풍성하였다.
북에서도 남쪽의 반응이 상당히 궁금했던 것 같다. 축구팀과 함께 「월남」한 북의 기자들은 남의 보도 태도가 영 입맛에 닿지 않은 것 같다. 「사시적이고 정치 색채가 짙다」고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든 실례가 이러하다. 집단체조를 보고 잘했다면 잘했다고 해서 그만이지,획일이다 기계적이다 하는 비평은 못마땅 하다는 항의이다.
남북 분단은 단일민족의 이질화를 초래 하였다. 사고는 물론 언어 풍습 문화가 갈수록 달라진다. 이질화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헤아리기가 힘든다. 남에서 보는 북은 이상하다. 북에서 보면 남이 남(타국)보다 더 알기가 어렵다.
잇단 남북왕래로 북의 불가사의가 떠오른다. 보도된대로 축구팀과 음악인들의 방북을 평양은 「열렬하게」 환영했다. 그쪽 표현을 빌리자면 「인민들이 떨쳐 일어나」 뜨겁게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총리회담 대표가 입북할 때엔 열기가 갑자기 냉기로 변했다.
열과 냉의 차이를 재고 구분할 필요와 이유는 없을 것이다. 놀랍고 신기한 것은 대중감정의 급변과 표현이다. 극에서 극으로 바뀌는 개인과 집단감정의 기폭이 어떻게 그만큼 철저할 수 있을까 의문이 솟구친다.
개인은 물론이고 집단의 감정조절은 쉬운 일이 아니다. 희노애락을 마음에 맞게 조정하는 것은 신선이 아니면 로봇이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울고 싶어도 참는 것은 눈물겹다. 참다가 터진 눈물은 막히지가 않는다. 남한에도 북한과 같은 동포가 살고 있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조국통일이라는 말 한마디에 눈물이 와락 솟는 것이나,방북한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열기와 냉기가 왔다갔다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감정처리」이다.
그렇다면 북한주민 개인감정이나 집단감정이 이념의 「관리」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념에 의한 관리는 나름대로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감정의 관리는 참으로 곤란하다. 아무리 우리식 대로 산다고 주장해도 그것은 몰인간적인 지배의 관리체제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또다른 난해의 벽에 부딪친다. 사고가 아주 생소하다는 이질감의 두꺼운 벽이 바로 그것이다. 따져보면 언어의 이질성 같은 것은 서로가 마음먹으면 대단한 고통을 겪음이 없이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살아가려면 공통점의 발견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심성의 변화는 다르다. 사람이 다르면 맞춰 나가기가 난감하다. 이것이 어려운 과제이며 그 해답을 찾기위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무 어렵게 여길 필요는 없을 줄 안다. 해결의 단서가 될 「암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련 국제관계연구소 쿠나제 부장은 일본 신문과의 회견에서 북한의 변화 가능성에 이렇게 응답한다. 『북조선은 독재정권이어서 최고책임자가 진정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결과는 기대할 수 없다』
상식적이고 소박한 의견이지만 귀담아 들을만 하다. 북한 「인민」의 감정관리도 이처럼 최고 책임자의 의사에 달렸다고 한다면 의문의 한가닥은 풀릴 수 있는 게 아닌가. 쿠나제의 지적대로라면 북한의 체제는 분명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북한의 선택은 많을 수가 없다. 시대 조류에 눈을 뜨고 순응하며 통일기반의 구축에 이바지 하려면,길은 민주화의 외길 뿐일 것이다. 자주ㆍ평화ㆍ민족대단결의 통일 3원칙은 민주화를 전제로 해야 의미가 살아 난다. 민주화도 민주화 나름이다. 우리식대로를 고집하는 한 민주화의 통일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독일의 통일은 무조건 무원칙으로 성취된 게 아님은 알려진 그대로이다. 원칙은 민주 그것이다. 즉 자유 속에서의 통일(Einheit in Freiheit)인 것이다. 원칙이 없는 통일은 바랄 수도 없고 실현 가능성도 없음을 독일국민이 입증하였다.
우리 내부의 민주화를 다그침과 동시에 북한을 향해서도 바른길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대담성이 요구된다. 아량은 보여도 엉기는 것은 막아야 옳다. 협력은 하되 유약한 자세를 보일 까닭도 없다. 민주화를 어느 한쪽의 과제로만 삼는 편견도 버려야 할 것이다.
북한이 변하고 안하는 것은 결과의 문제로 삼아야 한다. 서로 할 말을 주고 받는게 위험하다는 생각은 버렸으면 좋겠다.<논설위원>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