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바람」 속에 「불변의 허세」/말끝마다 “통일”… 판에 박은 논리/행인차림ㆍ서울 관심은 새 모습설레는 마음은 서글픔을 안고 돌아왔다. 가까워졌다고들 하지만 직접 체험한 평양은 아직도 먼 곳이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때문일까,아니면 실상을 잘 몰랐기 때문일까. 판문점을 지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어오는 기자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3박4일간 평양에 머물면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들었던 단어 중의 하나가 「통일」이다. 그리고 이 「통일」얘기는 어김없이 방북 인사의 신병문제와 콘크리트장벽 주장으로 끝났다.
판에 박은 듯한 「획일의 논리」가 넘실대는 곳이 바로 분단의 북쪽이었다.
학생소년궁전에서 만나 세 살짜리 코흘리개로부터 천리마거리에서 만난 10대 단발머리 소녀,접대원 안내원 보도일꾼 등 스치는 사람이면 예외없이 「통일」이다.
3천 청중이 꽉찼던 교예극장(서커스)의 피날레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고,10만 관중이 운집된 김일성경기장의 집단체조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끝난다.
정말로 북한은 상상을 초월하는 획일성과 집체성이 강조되는 특이한 체제다.
『일(필요) 없습네다. 우리는 없는 것이 없습네다. 통일만이 염원입네다』 기자가 준비해간 선물을 전하려 할 때마다 반복되는 거부의 첫마디다.
이렇듯 「통일」이라는 사회최면적 지배이념과 유일사상으로 휘감긴 북한주민들로부터 그들의 참 모습을 찾아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남북간의 이념이나 체제우월성 문제가 돌출할 때면 똑같은 목소리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일사불란함을 보인다.
『조일관계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는 일본이 우리에게 사죄를 했다고 했디요. 백기를 든 이상 「광폭의 정치」를 펼치는 것이 사회주의의 정치입네다』
『남조선이 소련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두개의 조선」을 고착화시키려는 음모디요. 고르바초프 그 사람은 개혁과 개방한다고 나라 망쳐 놓은 기회주의자 아닙네까. 덩치값도 못하디요』
최고위 지도급인사로부터 길거리 간이매대의 판매원에 이르기까지 토씨와 억양마저 비슷하다.
「인민들은 당을 자기생명보다 귀중히 여기고 있다」 「당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생각하는 것보다 잘 이해해주고 있다」 「당과 인민대중은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뭉쳐 있다」. 이러한 자기 최면은 「당이 결심만 하면 목숨바쳐 따라간다」는 평양시내에 나붙은 길거리의 구호로 곧바로 이어진다.
어른들은 「위대하신 어버이 수령」,아이들은 「위대하신 아버지 원수님」으로 말문을 여는 것은 듣던 대로 여전하다.
동구사태와 개방의 국제정세를 염두에 둔 듯,「당과 인민대중」은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뭉쳐있고,혈연보다 더 굳게 맺어 있다는 점을 안타까울 정도로 강조한다. 『로무니아(루마니아)는 당과 인민의 관계가 물과 기름이어서 그같은 비극을 맞았디요. 인민의 지지없는 당은 뿌리없는 나무 아닙네까. 하지만 우리는 굳게 밀착돼 있으니 일 없습네다』 묻지 않아도 누구에서나 술술 나오는 북한의 개방에 대한 대응논리이다.
기자가 묵었던 백화원초대소의 접대원들은 『세찬 바람이 불어도 거센 격랑이 일어도 우리는 더욱 밀착해 흠모의 정으로 어버이 수령님을 모실 것』이라고 눈물을 글썽인다.
처음 들었을 땐 섬뜩했던 느낌이 이말을 되풀이하는 경직된 표정에 익숙해지자 연민과 동정으로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 연민과 동정은 절해고도의 「이방사회」에서도 사람의 숨결을 찾아낼 수 있게 해준다. 바로 여기에서 실날같은 희망이 되살아난다. 「허허실실」이라고 했듯이 변화하지 않았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바로 변화할 수 있는 「상황」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밤길을 갈 때 무서움을 쫓기 위해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허세」가 이들의 몸부림 속에 깊게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소중한 것은 무서운 사상의 동질성 속에서도 「변화의 바람」,개방과 자유를 향한 잔잔한 물결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남쪽이야 빈익빈,부익부로 극소수의 사람만 배불리고 있지 않습네까. 우리네야 모두가 골고루 부러움 없이 살고 있디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상투적으로 등장했던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인민」들이라는 표현이 없어졌다.
『베이징(북경)대회에서 우리가 당당히 종합 2등을 했디요』 웬만큼 배웠다는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느슨해지자 북쪽기자들과 안내원들은 『아마도 축구경기를 잘못 안 것 같으니 수정글을 써달라』고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연형묵 정무원 총리.
최문선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양형섭 최고회의 의장이 잇달아 주재한 만찬에는 북한의 각계 사회지도급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다. 공식석상에서 변화의 조짐을 느낀 것은 차라리 역설적이었다.
판에 박은 주장을 하다가도 우리쪽의 「얘기」에 말문이 막히면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하나같이 서울에서의 일과 외부의 돌아가는 판세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꼬치꼬치 물어왔다.
『북쪽에서는 당이 결심하면 인민들이 따라가지만 남쪽에서는 국민이 결정해야 정부가 움직인다』는 얘기를 하자 새로운 사실을 알기라도 한 듯한 표정들이었다.
외형적이기는 해도 생활패턴의 변화는 북한의 변화중 가장 큰 변화일 듯 싶다.
평양거리에서 느껴지는 행인들의 차림새,건물의 색깔,한적한 교통 등은 우리의 60년대 말을 연상케 했지만 무언가 움직이는 기운을 감지케 된다.
여성들의 옷차림은 뉴똥치마 저고리,테토론 투피스로 회색이 주조였으나 빨강,파랑,연분홍의 원색도 적잖게 보인다. 대낮의 평양거리는 한산했지만 출퇴근시간이 되면 괘 많은 사람이 바삐 움직였다. 당과 수령일색인 구호의 틈바구니에서 투박하긴 했지만 네온사인이 거리를 밝히기도 했다.
원색의 옷 색깔과 투박한 네온사인이 바로 기자에게 숨기려했던 평양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북한 당국이 애써 감추려 했던 참모습이 있다면 이는 바로 작은 변화의 조짐일 것이다.
이러한 작은 변화의 조짐들을 놓침없이 확대시켜 나갈 때 엄존하고 있는 「현실의 벽」도 낮아져 갈 것이다.
동구의 변화와 독일의 통일서 보았듯이 체제우월성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미 끝났다.
비록 시지푸스의 신화가 될지언정 우리는 어느 경우에도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초행의 서글픔이 언제까지 서글픔으로 남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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