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강영훈 총리가 북의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웃으며 악수를 한다. 건강을 치하하고 노고를 치사한다. 대리석으로 치장한 주석궁이 호화롭다. 텔리비전 카메라맨들의 움직임이 좀 혼잡스럽다.그런 장면을 텔리비전으로 보면서,세상이 달라졌음을,또 달라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안방에 앉아서 주석궁의 김일성을 직접 보고,우리 대통령의 직함을 깍듯이 호칭하는 그의 육성을 듣다니…. 그 느낌은 충격에 가깝다.
비슷한 장면은,지난달 일본의 가네마루 전부총리 방북때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남남끼리의 만남이며,남의 카메라로 엿본 것이었다. 이번은 비록 갈라졌지만 한핏줄끼리의 만남이요,우리 카메라가 잡아보낸 영상이다. 한달 남짓사이 비슷한 장면이지만,아무래도 비교가 된다. 김일성의 거동도,그때는 제스처가 커서,나이에 비해 퍽 활발하게 비쳤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그 편이 긴장한 듯하고 말수도 적은 듯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그런 겉모양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 깊숙한 얘기야 강총리와의 단독면담에서 했겠지만,단 몇분 공개면담에서 그가 들려준 육성만해도 많은 것을 함축한 듯 했던 것이다.
그는 초두에,총리회담이 열린 것 자체를 평가하면서,「80년대로부터 시작해서 10년만에 겨우」 회담이 열렸음을 말했다. 이 대목은 10ㆍ26뒤인 80년 1월 북한이 남북 총리회담을 먼저 제의했던 것과 관련된다. 이 사실을 상기시켜 북측의 이니셔티브를 은근히 과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 제의는 예비회담조차 제대로 못해보고 8개월만에 결실없이 끝났다. 그때 우리측 대표였던 김영주씨(전 주영대사)는 북측 대표들이 회담시작전 악수를 하면서도,「동포의 피가 묻은 손을 잡는 것조차 부끄럽다」는 투로,광주사태를 트집잡아 예비회담을 파탄시켰던 것으로 회고한다(중앙일보 9월9일). 10년전 총리회담을 제의한 것은 저쪽이었지만,파투낸 것도 저쪽이었던 것이다.
그는 또 남북 정상회담을 기대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양측 총리가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것이야말로 면담의 본제라고 할 부분인데,우리측 보도는 그 「기대」에 대한 「기대」를 상당히 부풀리고 있다. 당연한 「기대」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나는 그의 걸걸한 목소리를 들으며,북의 문건 하나를 상기했다. 그것은 지난 7월 7ㆍ4공동성명 18주년에 즈음하여 북의 「정부ㆍ정당ㆍ단체 대표들의 연석회의」가 냈던 공동성명이다. 「통일대화의 가장 권위있는 형식」으로 「민족통일협상회의」의 소집을 제창한 이 성명의 끝부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북남최고위급(정상)회담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께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남조선의 최고위급을 만날 의사를 표명하시었으며,올해에도… 협상회의가 소집되면 그 테두리 안에서 최고위급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하시었다.… 우리는 남북 고위급(총리) 정치군사회담이 성과적으로 추진되어 남북 최고위급회담의 길을 터놓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 성명에 의하면 「2개의 조선」 책동중지,팀스피리트훈련 중단,보안법 폐지,방북인사 석방 등이 회담의 전제조건이다. 연형묵 총리가 제시한 총리회담의 기조나 김일성의 육성이 여기에서 더 나아간 것이,아직은 아무 것도 없다. 강총리 단독면담에서 다른 목소리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이 성명에 보인 남북 정상회담과 총리회담의 자리매김도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남북의 총리가 상대방 정상을 상호 예방한 것은 분명 획기적인 일이다. 72년 이후락 박성철 밀사,남북조절위 대표단의 남북 정상면담등의 선례가 있으나 이번 일과는 격식이 다르다. 하지만 72년의 일들이 선례로서 기억할만 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것 두가지만을 여기 적어 두자.
72년 정상면담은 한마디 한마디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아직 극비문서로 되어있는 그 기록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김신조등의 청와대 습격미수 사건에 언급했고,김일성이 유감의 뜻을 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례가 버마의 아웅산참사,김현희의 KAL기 폭파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역시 세상이 달라졌으니,덮어 두는 것이 옳을까.
그해 남북밀사의 왕래는 7ㆍ4공동성명이라는 「합의문서를 도출」하는데 성공했다. 7개항으로 된 이 「합의문서」는 북측 제안인 자주ㆍ평화ㆍ단결의 통일원칙을 그 첫항에,그 밖의 비방과 무장도발 중지ㆍ다방면적 교류ㆍ적십자회담ㆍ직통전화 가설 등 남측 제안은 나머지 항목에 담아 접목한 것이다. 이견은 이 「합의문서」의 성격에도 있었다. 서명자의 직함을 밝힌 공식문서로 하자는 북측 주장을 남이 반대한 것이다. 그 결과로 「서로 상부의 명을 받들어,이후락,김영주」라고만 밝힌 공동성명 문안이 탄생했다.
이렇게 어렵게 나온 7ㆍ4공동성명의 그 뒤가 어떻게 됐던지는 우리가 다아는 대로다. 경위야 어떻든 그 첫항의 통일 3원칙만 살아 남고,여타 항목은 사문화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총리회담에서도 북측이 제시한 회의3원칙의 첫째가 통일 3원칙이며,비방중지 등 여타 항목은 새로운 합의가 필요한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이번 평양회담에서 우리측은 어떻게든 「합의문서를 도출」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것은 우리측이 새로운 합의문안을 마련한데서도 엿볼 수가 있다. 그 문안은 북측의 회의 3원칙을 첫항에 수용하여 우리측 제안(2∼8항)과 접목한 것이다. 어딘가 7ㆍ4공동성명 협상을 닮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데,문안의 2∼6항 역시 7ㆍ4공동성명에서 사문화된 여타 항목과 거의 비슷하다. 원칙만 남고 나머지는 사문화했던 선례를 기억할 만도 한 대목이다.
지난 한 여름 범민족대회,민족대교류선언과 함께 달아 올랐던 통일열기는 갈수록 열도를 더하고 있다. 총리회담과 통일축구,범민족음악대회 등 남북 왕래도 숨가쁘다. 마치 온 나라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 같다. 기대가 큰 만큼 조심스럽다. 또 한차례 총리회담 일자를 잡아 놓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아직은 두고보자는 한마디로 그친다.<상임고문ㆍ논설위원>상임고문ㆍ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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