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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종식 세계화해물결 주역/노벨평화상 수상 고르바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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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종식 세계화해물결 주역/노벨평화상 수상 고르바초프

입력
1990.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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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후 개혁ㆍ개방 앞장/통독등 동구격변 유발/대미 군축협상등서 입장 강화될 듯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59)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그의 국제적 명성과 업적에 비춰 볼 때 오히려 때늦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번 수상은 동서간의 냉전종식과 이에 따른 신 데탕트시대의 정착에 이바지 한 그의 공로를 고려해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은 소련의 사활이 걸린 새로운 경제계획안 채택과 대미 군축협상과정 등에 있어서 그의 입지를 한층 강화시켜 줄 것으로 보인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노벨상위원회의 선정과정에서 바츨라프ㆍ하벨 체코 대통령,넬슨ㆍ만델라 아프리카 민족회의 지도자 채령 천안문사태 관련 주모자 등과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그러나 노벨상위원회가 이날 공적사항을 통해 밝힌 대로 『오늘날 국제사회의 골격을 특징짓는 평화정착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공로』가 인정돼 71만달러의 부상이 따르는 영예를 거머쥐게 됐다. 공산국가의 현직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이자 소련인으로서는 지난 75년 사하로프박사에 이어 두번째 받는 평화상이다.

○“오히려 때늦은 감”

고르바초프는 지난 85년 3월11일 체르넨코의 후임으로 당 서기장에 선출돼 집권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건설을 표방하고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밖으로는 동서 양진영의 평화공존을 뼈대로 한 「신사고 외교」를 펼치는 한편 안으로는 대대적인 개방(글라스노스트)과 개혁(페레스트로이카)을 단행했다.

고르바초프의 이같은 노력은 지난해말 몰타에서 열린 미소정상회담을 통해 냉전종식을 선언케 했으며 금년 2월에는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폐기하는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고르바초프는 특히 지난해 동유럽을 휩쓴 일련의 민주화운동에 철저한 불간섭정책을 펴는 한편,나아가 이들의 민주개혁을 고무함으로써 이 지역의 정치지도를 뒤바꿔 놓는데 주도적 역할을 떠맡았다. 고르바초프가 동구에서 은밀히 추진해온 탈공산화 고무정책은 지난해 11월9일 베를린장벽 붕괴에 이어 이달 3일 동서독의 재통일로 그 절정에 달했다.

소련이 지난 87년 미국과 체결한 중거리핵무기(INF) 폐기협정도 고르바초프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공적중의 하나다.

고르바초프는 현재 유럽배치재래병력감축협상과 전략핵무기감축협상 등 대미 감군협상을 마무리하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

○한반도에도 큰 역할

고르바초프가 일으킨 「신사고」바람은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에도 태풍을 몰고 왔다.

고르바초프는 86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으로 대 아시아 화해정책을 천명한 이래 88년 9월에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선언으로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제의했다. 이 두가지 선언은 지난달 30일 발표된 역사적 한소수교의 밑거름이 됐었다.

고르바초프는 집권 5년반 사이에 「냉전체제 붕괴의 물꼬를 튼 기적의 마술사」로 불릴만큼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지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내치에 있어서도 그는 「슈퍼 차르」 또는 「계몽군주」로 불릴만큼 강력한 통치기반을 다지고 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그가 이제까지 이룩한 엄청난 성과에 못지않은 숙제를 안고 있다.

발트3국을 위시한 각 공화국내에서 들끓고 있는 독립운동을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그의 첫번째 과제다.

고르바초프는 지난 3월11일 독립을 선언한 리투아니아에 대해 경제봉쇄조치를 취함으로써 봇물 터지듯 분출하는 공화국들의 탈소 독립움직임에 쐐기를 박았다. 이번 노벨평화상 심사과정에서도 고르바초프의 독립운동 탄압상이 하나의 결격사유로 지적되기도 했다.

○성과 못지않게 숙제도

고르바초프에게 주어진 두번째 과제는 시장경제의 도입이다. 또 이 제도의 채택을 둘러싸고 개혁파와 보수파간의 대결이 첨예화될 가능성도 높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경제수석 보좌관인 스타니슬라프ㆍ샤탈린이 내놓은 급진적 경제계획안과 보수파인 니콜라이ㆍ리즈코프 총리가 마련한 온건안을 적당한 선에서 절충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으나 양측 모두가 선뜻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소련문제 전문가인 컬럼비아대 로버트ㆍ레그볼드 교수는 『크렘린 내의 이같은 보혁대결이 심화되는 경우 소련은 일반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바 있다.

레그볼드 교수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자신이 주창한 개혁을 지지하는 신진 정치세력으로부터 가장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난 5년반동안 고르바초프가 실증해 보인 것처럼 그는 「조정의 명수」이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변화가 자신의 지도력을 앞질러가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이상석기자>

◎85년 체르넨코 급서로 실권 장악/상황판단 빠르고 대중연설 능해

미하일ㆍ세르게이비치ㆍ고르바초프는 지난 31년 3월2일 러시아공화국 남부 스타브로폴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고르바초프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고향에서 다녔는데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집근처에 있는 손바닥만한 밭뙈기에 채소를 직접 재배,인근의 협동농장에서보다 훨씬 높은 수확을 얻곤 했다. 고르바초프가 토지사유화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은 당시의 경험에서 비롯됐다는 일화도 있다.

50년 모스크바대 법학부에 입학한 그는 5년동안 재학,이무렵 한 댄스파티에서 현재의 부인 라이사를 만났다. 라이사는 동향 출신의 철학과 학생으로서 두사람은 첫번째의 만남에서 한눈에 반했다는 것이 고르바초프 동료들의 회고이다. 두사람은 모스크바대 재학때인 54년 결혼했다.

이듬해 고향에 돌아온 고르바초프는 콤소몰(청년당조직)의 일을 보다가 표토르ㆍ쿨라코프 농업담당서기를 만나 출세의 기반을 마련했다.

78년 안드로포프 서기장 우스티노프 국방장관 등의 도움으로 농업담당서기에 올랐지만 거듭되는 흉작과 실정으로 한때 콘스탄틴ㆍ체르넨코파로부터 축출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관운이 좋았던 고르바초프는 85년 3월11일 체르넨코의 급서로 극적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대중연설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는 그는 특히 상황판단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있다.

가족으로는 라이사여사와 결혼한 외동딸(의사),그리고 외손녀 2명이 있다. 술은 약간 마시는 편이나 담배는 안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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