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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물정치의 비극/박승평(아침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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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물정치의 비극/박승평(아침조망)

입력
1990.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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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거대한 용광로를 산업발전의 상징탑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포철에 가보면 하루 수천톤씩 선철을 녹여내는게 여간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다. 거창하고 구조가 복잡해지긴 했다지만 쇠를 만들어내는 기본원리는 옛 대장간의 풀무질이나 도가니와 별 다를게 없다고 생각하면 친근감마저 느끼게 된다.그래서 우리는 용광로를 멜팅포트(Melting Pot)라고 부르며 쇠를 만드는 단순한 기구라기보다는 다양한 요소를 융합ㆍ용해시켜 유용한 가치를 창출해 내는 기능의 대명사쯤으로 곧잘 떠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용광로의 작동원리를 보면 원광석과 연료인 코크스,그리고 촉매제인 석회석 등 서로 다른 세가지를 노에 함께 넣은뒤 고온의 열풍을 집어 넣어 발화ㆍ용해시켜 쇳물이 흘러내리게 만드는 것이어서 그 상징성이 쉽게 납득된다.

그러고보면 오늘의 정치상황도 비록 그 의미나 가치가 전도됐다 해도 용광로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만 같다. 당초 여소야대에 쩔쩔매던 민정당이 정치 초년생인 포철맨을 당대표로 파격기용했던 것이라든지,그후의 3당합당이 마치 용광로에 원광석ㆍ코크스ㆍ석회석을 퍼붓듯 민정ㆍ민주ㆍ공화를 한꺼번에 엮어 오늘의 거대여당 민자를 만들면서 「구국적 결단」이니 「신사고」니 하고 자찬했던 게 생각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거대한 정치용광로는 지금 어떤 꼴로 버려져 있는 것인가. 기대했던 융합과 창조의 쇳물은 흘러나오지 않고,용광로가 깨어질 듯 내분의 연쇄반응만 일어 정치불안이 가중되다 못해 오늘의 정치실종사태를 빚었다. 또 정치실종은 행정표류와 함께 지도력상실­신뢰저하­사회불안­총체적 난국으로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덩치는 커졌지만 스스로의 몸을 추스르기도 힘겨웠다는 공룡을 연상시키는 우리의 정치적 멜팅포트가 지닌 비극성은 얼마전 기강확립과 패도정치의 공방 끝에 포철과 광양만으로 「용광로 견학」을 떠났던 민자 수뇌부의 소위 화해명목 여행에서 극명하게 노출되기도 했다.

왜 하필이면 내분을 잠재우겠다며 택한 여행지가 그곳일 수 밖에 없었으며,현지에서 시뻘겋게 녹아흐르는 선철의 흐름을 보고서도 왜 아직 진짜융합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지도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거대여당의 쇳물정치기도가 어긋나고만 있는 표피적 원인쯤이야 누구나 짐작한다. 92년의 대권차지 욕심때문이다. 사실 정치인의 권력욕이야 탓할 일이 못되겠지만 그들로 하여금 오직 대권으로만 저돌맹진케 하는 충동적 맹목적 동기부여와 과정이 문제인 것이다.

최근 드디어 숨어있던 그 얼굴이 정체를 드러냈다. 보안사의 민간인사찰로 꼬투리가 잡힌 여전한 군사문화의 탁류와 전투적 열병의 가열함이 그것이다.

최근 외지에서 읽은 군사문화에 관한 어느 에세이는 아직도 지구상에서 날뛰고 있는 전사들의 행동에 관해 『그들은 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군가에 흥분하고 총검의 섬광과 피냄새에 취해 곧장 싸움터로 달려가고 또 달려간다』고 그 야만성과 충동성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같은 군사문화의 저변에는 인간의 파괴본능과 물욕,그리고 전투적 행위야 말로 불안을 쫓는 가장 확실한 해독제로 여기는 착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또한 군사문화가 주는 해독에 관해서도 노력과 깊은 사려나 창의 대신 힘과 공격에만 매달린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쇳물정치의 비극과 총체적 난국을 자초한 심인을 알 것도 같아진다. 대권욕심들로 자기네끼리 전투를 계속 벌이다 보니 그만 정신을 뺏겨 국민이고 민생이고가 보이지 않게 됐고 복잡다기한 각종 위기에도 무책으로 흘러 그 화가 사해에 미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정치행태를 분석하는 학자들은 위기에는 사람을 둔감케 하고 넋잃게 만드는 마비성이 있는 것 같다고 진단한다. 전투적 열병에 빠져 창의와 심모원려의 노력을 게을리하다 보면 위기가 또 위기를 낳는 법이고 그러다보면 일이 곪아터지기 전에는 꿈쩍을 않을 정도로 몸가짐도 무거워져 실기를 하고 마는 악순환의 연속이 생겨난다.

아무리 사람이 똑똑해도 일단 이 마비와 악순환의 와중에 휩쓸리면 소용이 없음을 오늘의 우리는 실감한다. 근본정신과 자세는 바꾸지 않으면서 사람만 바꿔봤자 한강의 조약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통치자의 리더십과 사회지배계층의 지도력이 새삼 중요해진다. 지도력이란 별것인가. 위기를 위기로 알고 기민하게 대처하는 자세에 다름아닐 것이다. 표류와 분열과 불안정의 늪에서 헤어나려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치세의 지혜를 익혀 앞날에 대비하고 경륜을 축적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위기란 또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난세에 인물난다』는 말처럼 위기때야말로 남다른 결단과 각오로 역사에 족적을 남길 수 있어 무한한 가능성의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의 거대한 정치용광로는 창조의 쇳물은 녹여내지 못한채 칙칙한 내분의 검은연기만 토해내고 있다. 거창한 설비로도 쇠를 못만들어 낼 바에야 지금부터라도 차라리 구슬땀을 흘리는 대장간시절로 되돌아가 풀무질과 담금질부터 새로 배우게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마저 하는 국민들의 아린 흉중이다. 그걸 과연 누가 알고 쓰다듬어 줄 것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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