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7일 독일민주주의공화국(동독)은 건국 4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정부가 계획한 기념행사는 반정시위 물결에 휩쓸렸다. 23일 베를린의 시위군중은 30만,11월4일에는 그 숫자가 50만으로 늘어났다. 그 닷새 뒤인 11월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동독의 마지막 총리 드메지에르는,동독의 종언을 선언한 3일의 고별연설에서,이 격동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했다.『자유화의 수단은 폭력이나 과격,파괴가 아니라 평화로운 시위와 기도와 촛불이었습니다』
독일통일의 큰 일을 해낸 서독의 헬무트ㆍ콜 총리는 그의 통일선언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자유에 대한 열망의 힘으로 독재를 이겨낸 동독국민의 덕분입니다. 그들의 평화주의와 신중함은 귀감으로 남을 것입니다』
작년 가을 달포사이에 일어난 대변혁은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를,그리고 그 힘은 어떻게 발휘 되는가를 보여준다.
63년 8월13일 동독은 동서베를린 경계에 장벽을 쌓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은 어물어물하다 이를 막지 못했다.
8월19일 장벽을 넘어 탈출하려던 롤프ㆍ우르반이란 49세의 남자가 죽음을 당했다. 이 뒤 1백92명이 이 장벽을 넘다 숨졌다. 지금 남아 있는 최근의 나무십자가는 89년 8월4일의 기일을 새기고 있다. 장벽이 무너지기 3개월 전이다.
장벽이 처음 축조되었을 때의 문제는 베를린을 점령한 미국ㆍ소련ㆍ영국ㆍ프랑스의 4개국협정 위반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베를린시장 빌리ㆍ브란트는 장벽이 생긴 3일 뒤 시청앞에 모인 군중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문제는 서방 3국의 권리가 아니라,인권의 회복입니다. 이 장벽으로 평화가 위태로워졌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한 발짝,아니 반발짝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결의를 가지고 눈앞의 위기에 맞서야 합니다』
서독의 총리 콘라드ㆍ아데나워는 이렇게 선언했다.
『장벽은 영원할 수가 없다』
전후 독일의 두 거인이 밝혔던 신념은 지금 더욱 새삼스럽다. 역사의 교훈이 있다면,그것은 베를린 장벽처럼 자유를 부인하는 체제가 영속할 까닭이 없다는 신념이다. 언젠가 이땅 남북의 장벽도 그렇게 무너질 날이 온다.
당시 50세이던 브란트는 69년 서독 사민당 정권의 수반으로 동방정책을 편다. 그는 동서분단의 현실과 2차대전 뒤 오므라든 독일국경을 인정하는 대가로 동독 슈토프 총리와의 2차례 정상회담을 실현했다. 이것이 오늘날 기적처럼 이루어진 통독의 시발점이다. 우리 처지에서 이를 자주 원용해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가 베를린 장벽 앞에서 보였던 의연함은 동방정책의 구체적 전개과정보다 더 중요하다. 「인권의 회복」이라는 그때 그의 말속에 동방정책의 정신적 기조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폈던 대독 정책의 바탕은 동독동포의 자유와 인권 등 삶의 조건을 높이는데 있었던 것이며,그래서 통일욕구를 접어둘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서 비롯된 「1민족 2국가론」이나,동독원조정책의 논리적 근거가 여기 있다.
동방정책을 닮은 우리 북방정책이 빠뜨린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그 북방정책에는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는 철학이 빠져 있는 것이다. 정부의 대형이론,동반자론,정상회담론이나,일부 재야의 통일지상론이 모두 이 점에서 공통된다.
아데나워의 소신 가득했던 예언대로,「역사상 가장 비인간적인 축조물」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4반세기를 몇달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동독은 창건 41주년을 나흘 못채우고 「눈물 없는 이별」을 고했다. 과연 「20세기 후반 최대의 역사적 사변」이다. 1990년 10월3일은 그렇게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이날의 대변혁을 보는 시각이 꼭 한결같지는 않다. 그것은 이 대변혁이 독일의 통일이냐 재통일이냐는 「말싸움」에서 엿볼 수가 있다. 영어로 하면 Unification과 ReUnification의 차이다. 그 논란의 취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재통일은 예전상태로 돌아감을 뜻한다. 그 경우 전후처리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령으로 된 구 독일제국의 영토회복이란 문제가 제기된다. 그래서 콜총리는 작년에 내놓은 10개항 통일방안에서는 재통일이란 말을 썼으나 그 뒤로는 「재」를 빼고 있다. 브란트 전총리는 처음부터 재통일이 아닌 「새로운 통일」을 말해왔다. 사소한 듯한 통일과 재통일의 차이가 뚜렷한 역사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역사의식은 양독총리의 통일선언 연설과 고별연설에서도 읽을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통일과 재통일의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정작 있어야 했던 것은 「새로운 통일」의 모색이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이전의 상태로의 환원이라는 복고적 재통일도 아니고,분단 45년을 없었던 것으로 치는 몰역사적 통일도 아닌,새로운 통일개념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나름의 통일모델을 정립할 수가 있고 통일정책의 앞뒤를 맞출 수가 있다.
독일통일이 주는 교훈의 으뜸이 여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상임고문ㆍ논설위원>상임고문ㆍ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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