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일등공신… 총선 승리자신/“일 집착ㆍ추진력 강한 거인”평독일통일의 실현으로 독일 이란 국명앞에 어김없이 붙여져왔던 동과 서라는 수식어가 사라졌듯이 헬무트ㆍ콜(60)의 직함도 서독총리에서 독일총리로 바뀌었다.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89년 11월9일부터 독일통일이 공식선포된 90년 10월3일까지 세계인 모두에게 경탄과 우려를 함께 던져주며 쾌속질주한 통독의 도정에 있어 1등공신이 콜총리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헬무트ㆍ콜총리는 「과도총리」에 머무르지 않고 오는 12월2일 전독총선의 승리를 거쳐 실질적인 초대 독일총리로서 「하나된 독일」의 첫걸음을 설계할 것이라고 모두들 믿고 있다.
콜총리는 통일에 즈음한 성명에서 『우리는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이며 결코 평화의 적들에게 우리의 민주주의를 또 다시 내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는 또 동독정부 해산식에서 『우리 모두가 단결하고 희생할 각오만 돼있다면 공동의 성공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독의 마지막 총리인 드 메지에르가 『허상의 종말이자 눈물없는 작별』이라며 과거를 회고한데 대해 콜총리는 이미 「하나된 독일」이 앞으로 해야할 「미래」에 대해 눈길을 돌렸다.
이러한 미래지향적 자세는 지난해 11월9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되면서부터 유난히 번득이기 시작했다. 당시 폴란드를 방문중이었던 콜은 귀국비행기에 오르기전에 비장한 어조로 『역사가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는 백지위에 새롭게 쓰여질 독일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자신이 쓰겠다고 다짐했으며 지난 11월동안 자신과의 약속을 실천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통일되려면 4∼5년이 걸려야 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11월28일 통독 10개항을 제의,통독논의의 물꼬를 튼 것은 바로 그였다. 또한 동독 공산당의 위성정당이었다는 거슬리는 과거전력을 아랑곳하지 않고 동독 기민당등 우파연합을 물심양면으로 지원,동독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게 함으로써 통일작업을 가속화시킨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도 역시 그였다.
지난 7월1일의 화폐통합 실현,7월17일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통일독일의 나토가입 허용 등 독일통일의 내외부적 장애가 숨가쁠정도로 하나둘씩 제거돼 나간 것도 콜의 추진력이 없었더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82년 52세의 나이로 서독총리가 됐을때 「촌뜨기」「저능아」로 혹평했던 서독언론들이 이 거구의 정치가를 괄목상대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그에 대한 혹평을 우스개로 받아 넘기는 포용력과 기회를 포착하면 결말을 볼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현실정치감각에 뒤늦게 눈을 돌린 것이다.
패전독일을 부흥시킨 아데나워의 직계임을 자부해온 콜에 대한 언론의 호의적인 평가는 기껏 「사람은 좋으나 세련미가 부족하고,성실하지만 전문지식은 없고,끈기는 있지만 대담하지 못하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문지식이 없었기에 나무가 아닌 숲을 볼 수 있었고 대담하지 못하게 보였던 것은 작은 기회에 연연하기 보다는 큰 기회를노렸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콜이 자신에 대한 야유에 일일이 신경을 썼더라면 일찌감치 들 것에 실려 정치무대에서 사라졌을 것』이라는 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콜의 최대정치적 자산은 그의 거구에 걸맞는 포용력이다. 그러한 포용력이 있었기에 독일통일이라는 거대한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30년생인 콜은 2차대전 종전당시 15세의 소련. 나치독일의 죄악에 무관한 그가 분단을 극복한 통일독일의 초대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섭리」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17세에 기민당에 입당,43세때인 73년 당수가 됐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기도 해 「무식꾼」이라는 비난은 그에게 다소 억울한 것처럼 보인다.<유동희기자>유동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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