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거대한 역사의 무대가 사람의 의표를 찌르고 전환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불과 2년전 우리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구조에 무엇인가 새로운 발짝소리가 다가서고 있음을 기대와 의심이 뒤섞인 심정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 10월1일에 과거 반세기를 청산하는 커다란 변화가 모습을 나타내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했었다.한국과 소련은 2년 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0월1일자로 국교관계를 텄다. 9월30일 두나라 외무장관회담에서는 다만 수교원칙 합의에 그치고,공식수교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공산이 클 것이라던 예측을 한발 앞선 것이다.
한ㆍ소 두나라의 수교가 예상을 앞지른 것은 지난달 28일 북한이 종전의 태도를 일변해서 일본과 「수교」에 합의한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은 확실하다. 소련으로서는 북한이 「두개의 조선반대」라는 교조를 포기한 이상 한국과의 수교를 더이상 늦출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친구도,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있다. 밉든 곱든 사실상의 동맹국이라고 해야될 일본은 북한과 수교원칙에 합의하면서 「하나의 조선」이나 배상의 시기 등에 상식을 벗어난 얼렁뚱땅 전술을 쓰고 있다.
어쨌든 유럽에서 시작된 탈냉전은 동북아에도 뒤미쳐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 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 아직도 평화쪽을 지지하고 있는 중국은 한ㆍ소 수교 이후 자세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남ㆍ북한을 중심으로 미ㆍ소와 일본ㆍ중국이 엇갈려서 새로운 안정과 평화를 탐색하는 흥정이 오갈 것이다.
아마도 우리민족은 20세기 들어 가장 중요한 외교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이익이 무엇이고,긴 장래를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를 국민적 합의로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소련이라는 새로운 국제관계의 파트너에 대해 성숙된 문화민족답게 주체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한ㆍ소 수교가 한반도의 평화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은 사실이지만,그것이 궁극적으로 민족의 재통일과 발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은 앞으로 하기에 달린 것이다.
우리는 소련과의 사이에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같은 비인도적 사건에 대한 사과뿐만 아니라,한반도 평화에 관한 안정적인 합의라는 근본적 과제를 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각종 단체들이 제살 깍아먹기식의 덤핑경쟁이나 선심경쟁을 벌이는 추태는 미리미리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정부나 정치인들도 모스크바 외교를 행여 정치적 전리품으로 독점ㆍ이용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두 나라가 85년 만에 손을 잡은 것은 소련측의 「경제적 필요」 이상의 큰 역사적 사건이다. 85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두나라의 사정도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이 85년 만의 만남이 동북아의 평화에 안정적으로 기여하는 관계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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