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이 교섭 급진전 계기/88때 선수단등 3천여명 파견해 분위기 조성/공 영사처장,수교일 변경 등 숨은 활약 돋보여○…한국과 소련이 1일 상오(한국시간) 유엔에서 열린 최초의 양국 외무장관회담에서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공식합의,역사적인 양국 수교 공동코뮈니케에 서명함에 따라 양국은 85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구한말인 1884년 7월 한로수호통상조약에 조인,외교관계의 막을 열었던 양국은 1904년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이듬해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양국관계가 자연 소멸된지 꼭 85년 만에 국교를 복원한 것이다.
해방 이후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과 6ㆍ25발발,냉전이데올로기의 지속으로 인한 체제대립으로 일체의 양국간 접촉은 단절돼 왔으나 미소의 화해,탈냉전ㆍ해빙기의 도래로 세계질서가 재편되면서 한소 양국 또한 새로운 역사의 전기를 맞게 된 셈이다.
○영사처,공식관계 기점
○…지난해 12월의 양국간 영사처 교환설치는 한소 양국이 정부간 공식관계로 접어든 제1보였으며 동시에 실질적인 쌍무관계의 증진으로 이어지는 기점이었다. 이에 앞서도 ▲88년 서울올림픽에 소련이 6명의 영사단과 1천여명의 선수단 및 관광객,예술공연단 2천여명을 파견해 친교의 분위기를 조성했고 ▲89년 4월 대한무역진흥공사와 소련 연방상공회의소간의 무역사무소 교환설치 ▲그해 6월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의 방소 등으로 양국간 관계개선의 징후는 두드러졌었다.
▲90년 3월 민자당 대표단의 방소 ▲6월 샌프란시스코 한소정상회담 개최 ▲8월 한국 정부대표단 방소 ▲9월 경제관련 4개 협정체결 등의 발 빠른 과정을 거쳤다.
○…한소 관계진전 과정에서의 가장 획기적인 이벤트라면 역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간의 샌프란시스코정상회담.
○도브리닌과 10번 만나
결국 이 회담에서 국교수립의 원칙이 합의된 뒤 상호 친서교환(7월) 등을 통해 이같은 정신과 의지는 거듭 확인됐고 양국은 급속한 교섭의 진전을 보게된 셈. 특히 이같은 교섭과정에서 공로명 주소 영사처장의 활약이 돋보였던 사실은 외무부 내에서도 화제가 될 정도.
공 처장은 샌프란시스코회담에서 첫 대면을 한 도브리닌 전 주미 대사(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외교담당고문)와 10여 차례에 걸쳐 단독으로 접촉,당초 91년 1월1일을 공식 수교날짜로 고집했던 소련측의 계획을 변경하게 끔 정지작업을 했다는 것.
○9월 방북 후 실체윤곽
○…한소 수교에 관한 소련측의 구체적 가이드라인이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은 지난달 3일 셰바르드나제 장관의 평양방문 직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렸던 「제2차 아태지역 대화ㆍ평화ㆍ협력 국제회의」 석상. 이 자리에서 셰바르드나제 장관은 우리측의 공 처장과 박철언 민자당의원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93년 아태지역 외무장관회담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이번 유엔총회에서 최호중 외무장관과 만나는게 어떠냐』라는 공 처장의 단도직입적인 제의에 대해 『나는 최 장관의 회담제의(2월15일)를 잊지않고 있다. 유엔에서 만나자. 최 장관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즉석에서 수락의사를 밝힌 것이 그것. 이어 키레예프 소련 외무부 국장이 9월 중순께 공 처장을 외무부로 초치,뉴욕에서의 한소외무장관회담을 정식 통보하면서 『양국의 금년중 수교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며 『모든 것이 두 장관이 하기에 달렸다. 곧바로 수교에 합의할 수도 있으며 시기는 문제될 게 없을 것』이라고 최종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정진석 기자>정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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