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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발효”로 막판 합의드라마/한ㆍ소 수교시점 싼 협상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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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발효”로 막판 합의드라마/한ㆍ소 수교시점 싼 협상과정

입력
1990.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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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측 “끌면 부자연” 강력 종용/보도자료엔 「91년 1월1일 발표」로 준비… 정정도/셰바르드나제,현장서 서명 문안 2줄 직접 수정○…한소 관계의 신기원을 이룩한 양국 외무장관회담은 당초 양측 실무자 접촉에서 91년 1월1일이 유력했던 수교 발효시점을 9월30일로 앞당기기로 전격 합의하는 등 막판까지 「드라마」를 연출. 한민족은 물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회담장 주변을 내용별 시간대별로 재구성한다.

○…한소 양국의 공동코뮈니케 발표가 기정사실화된 양국 외무장관회담의 초점은 수교 발효시기에 대한 절충.

이날 우리측 대표들은 회담장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그동안의 실무접촉 과정에서 소련측의 「91년 1월1일 발효」 주장이 워낙 완강해 소측 입장이 채택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 때문에 우리측은 회담 시작 전 이미 준비한 보도자료에도 『91년 1월1일을 기해 수교한다』고 명시했다가 회담 후 부랴부랴 9월30일자로 고쳐 배포하고 국내언론사에도 「초긴급」으로 이를 타전.

회담에 들어가 최호중 장관은 처음부터 『정식 국교를 수립키로 합의한 이상 유예기간을 두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며 즉시 발효를 제의. 이에 셰바르드나제 장관은 여러가지 사정을 들며 『1월1일자로 해도 오늘이 수교한 날이 될 것』이라며 당분간 사실상 수교형태를 취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는 게 배석자의 전언.

이러자 양국 장관은 일단 정상교환방문 등 다른 의제로 얘기를 돌렸다가 최 장관이 『미래의 동량인 아동들을 위해 각국 정상들이 만난 뜻깊은 이날 우리도 정식 국교를 맺고 이에 따라 코뮈니케도 오늘날짜로 고쳐 서명하자』고 강력 주문.

이에 셰바르드나제 장관도 『좋다. 미래를 책임질 어린이들을 위한 유엔정상회담이 있는 오늘부터 국교를 갖는 것으로 하자』고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였다는 후문.

즉시 수교발효에 동의한 셰바르드나제는 곧바로 보좌관에게 미리 준비한 러시아어 코뮈니케를 가져오도록 지시,내년 1월1일자로 되어 있던 발효일자를 직접 2줄로 그은 뒤 9월30일자로 고쳐넣었다는 것.

한편 우리측은 사전에 수교 발효일자를 내년 1월1일로 적은 코뮈니케 문안과 빈칸으로 되어 있는 문안 등 2가지를 준비했는데 외무장관회담에 앞서 가진 실무 접촉에서 소련측에 빈칸으로 되어 있는 문안을 제시하자 소련실무진들이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시.

○…수교 발효시기가 서명과 같은 날짜로 결정된 데는 지난 27일 하오 7시(현지시간) 일본과 인도네시아 공동주최로 열린 아태지역 외상만찬에서 첫번째로 만나 최호중­셰바르드나제간의 회동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후문.

만찬회동 당시 국내외 언론의 관심표적은 최 장관과 전기침 중국 외교부장간의 공식적인 첫 만남에 두어졌으나 최 장관은 오히려 셰바르드나제 장관과의 조우에 보다 큰 관심이 있었다는 나중의 설명.

최 장관은 만찬이 시작되기 직전 20여분 동안의 칵테일시간에 셰바르드나제 장관 옆으로 가 소련측이 그때까지 내심 굳혀놓고 있던 수교 발효날짜 즉 91년 1월1일을 수교와 동시에 발효되는 90년 9월30일(현지시간)로 앞당기자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유엔의 한 외교소식통이 전언.

결국 이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최 장관이 30일 회담에서 또다시 이 문제를 집중거론,마침내 셰바르드나제 장관의 수교 발효날짜 변경 결심을 얻어냈다고.

○…한소 외무장관은 회담을 마친 후 안보리 라운지의 소의회실로 방을 옮겨 공동코뮈니케 서명식을 가졌는 데 테이블 왼쪽에 셰바르드나제,오른쪽에 최 장관이 나란히 앉아 양측 실무자가 펼치는 공동코뮈니케에 만년필로 서명.

공동코뮈니케는 한글과 러시아어로 공동표기됐는데 소련측이 준비해온 코뮈니케에는 수교일자가 91년 1월1일로 돼 있어 양국 장관은 그 위에다 검은 글씨로 90년 9월30일이라고 고쳐 쓴 후 서명.

코뮈니케 서명과 함께 수교일이 9월30일로 밝혀지자 소련 타스통신 기자가 『내년 1월1일이라고 해놓고 날짜가 바뀌었느냐』고 물었고 셰바르드나제 장관은 타스통신 기자의 질문을 최 장관에게 귓속말로 설명.

최 장관은 이에 대해 양측 배석자들을 둘러보며 『그것은 우리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배석한 회담 실무대표들)의 잘못』이라고 웃으면서 대답하자 폭소가 터지기도.

최 장관은 특히 서명 후 배석한 공로명 주소 영사처장을 셰바르드나제 장관과 페트로프스키 소 외무차관(국제기구담당) 등에게 소개하면서 「미스터 앰배서더(대사)」라고 그 격을 높여 소개했는데 최 장관의 이같은 제스처는 수교합의를 했으니 대사관 개설과 대사 파견도 서둘자는 의사표시로 비춰지기도.<뉴욕=정광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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