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에 출간… 작전내용 같아/군신추앙 일 산본제독에 영향일본에서 「태평양전쟁의 영웅」「위대한 전략가」로 칭송받는 야마모토ㆍ이소로쿠(산본오십육) 해군제독이 한 영국소설을 본따 진주만 기습을 감행했다는 주장이 나와 화제가 되고 있다.
평소 이순신장군을 흠모한다고 밝혔던 야마모토는 일본의 「넬슨」으로도 비유되던 일 해군함대 사령관.
그는 진주만 공격에서부터 미드웨이 해전에 이르는 동안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한동안 승승장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었다.
특히 19척의 군함과 1백88기의 전투기를 한꺼번에 수장시킨 진주만 기습은 세계전사에 유례없는 대담한 전략으로 평가돼 일본에서는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 영국에서 출간된 한 서적에 의하면 야마모토의 전략은 지난 25년 미 영에서 동시 출판된 헥터ㆍCㆍ바이워터의 소설 「대태평양전」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본 뜬 것이라는 것.
화제의 책은 최근 영국에서 발매된 「태평양전쟁의 고안자바이워터」로 현재 뉴욕타임스지 런던 특파원인 저자 윌리엄ㆍCㆍ호난이 태평양전쟁 당시의 미 일 전략을 비교분석한 내용이다.
이 책은 내년 2월께 「너무 많은 것을 알았던 사람」으로 제목을 바꿔 미국에서도 출간될 예정인데 선풍을 일으킬 게 분명하다.
호난씨에 의하면 진주만 기습이 있은 41년 12월8일보다 10년이 앞선 31년을 무대로 설정한 바이워터의 소설은 일본군의 기습으로 미국의 극동함대가 무용지물이 되는데서 시작된다. 또 미일과 유럽의 참고문헌을 인용한 호난은 야마모토의 전술 뿐 아니라 태평양전쟁의 발발과정마저 신통하게도 이 소설대로 진행됐다고 주장한다.
한때 영국 첩보원으로서 독일에서 활동하던 바이워터는 1차대전후 워싱턴 군축회담에 따라 각국별 보유함정의 총톤수가 국력에 비례되던 시대에 세계 해군력에 정통한 전문가로서 미국ㆍ유럽의 신문ㆍ잡지에 자주 기고했으며 이에 관한 저서만 해도 여러권 있다.
그의 소설은 출간과 동시에 미국에서 일대 센세이서널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당시 워싱턴에 있던 야마모토에게도 틀림없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호난씨는 분석하고 있다. 19년 하버드대에 1년 연수했던 야마모토는 미 일간의 「허니문시대」로 불리던 26년부터 28년까지 주미해군무관을 역임했다.
임기를 마친 야마모토는 귀국후 전쟁이 터지면 대본영 전략입안자들이 될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는데 당시 야마모토의 이론은 『바이워터의 시나리오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한 상태』였다고 호난씨는 주장한다. 또한 바이워터의 책은 일본어로도 번역돼 모든 해군장교들의 필독서가 됐다는 것이다.
단지 일본어판은 일본의 패배로 귀결되는 소설의 끝부분이 「황군의 빛나는 승리」로 각색돼 있는 것이 다를 뿐이라고 호난씨는 덧붙였다.
아뭏든 이 소설의 영향을 받은게 분명한 야마모토는 일본 국내에 미국과의 개전 불가피론이 대두되자 일본 최고참모부가 그의 기습전략을 채택치 않으면 사퇴하겠다고 주장했다는 것.
야마모토와 바이워터의 차이는 바이워터 때 상상할 수 없었던 대규모 함재기를 동원한 기습공격 감행이었다.
물론 미국의 방대한 군수산업등 잠재력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있던 야마모토는 전쟁의 끝판에는 결국 일본이 패배할 것을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전쟁에 반대했었다.
호난씨가 인용한 고노에ㆍ후미마로(근위문마) 전일본총리의 일기는 야마모토가 『굳이 전쟁을 원하신다면 그들(미국)에게 1년내지 1년반동안 지옥같은 경험을 안겨줄 것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고 보고한 것으로 적고 있다. 일본의 초반기세가 개전 18개월을 고비로 내리막길을 치달을 것까지 바이워터의 「대태평양전」은 맞히고 있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야마모토와 대적한 미국도 이책을 인용한 흔적이 엿보이는 점이다.
바이워터의 소설은 미국이 필리핀을 조기탈환함으로써 전세를 뒤집는 것으로 돼있는데 태평양전쟁시 미국이 바로 이를 그대로 시행,역전의 계기를 잡았다는게 모든 군사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인 것이다.<윤석민기자>윤석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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