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베를린,「유럽중심」꿈꾼다/수도로 부활… 행정부 이전 미결/학술과 예술의 도시서 정치무대로 복귀 준비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상징하는 곳은 베를린이다. 근세 이후 독일민족사의 모든 흥망과 굴곡이 베를린의 운명으로 대변됐듯이,통일독일의 향후 행보를 조망하는 시각도 베를린이 다시 「유럽의 중심」이 될 것인가에 맞춰지고 있다.
빌리ㆍ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 「베를린은 독일민족의 숙명의 도시」라고 규정한 바 있다.
베를린이 분단의 상징이던 시절,이는 민족의 고난과 통일에의 갈구를 짊어지고 있는 숙명을 의미했다. 그러나 베를린이 통일된 민족의 수도로 재탄생한 지금,냉전의 틈바구니에서 통일의 초석을 깐 브란트의 통찰력은 독일과 유럽의 미래를 주도할 베를린의 숙명적 지위를 예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베를린은 지난 45년간 「분단의 중심」이었을 뿐 독일과 유럽의 변방이었다.
「민족의 수도는 베를린일 뿐」이라는 것은 역대 서베를린 시장들의 구호에 불과했다.
서베를린은 점령군 사령부의 공식 통치하에 있었고,서독의 중심은 임시 수도 본과 「금융수도」프랑크푸르트 등 라인강변에 있었다.
서독은 전후 폐허상태의 서베를린을 전략적 지원으로 서독 최대의 공업도시로 재건했다.
전전부터의 문화전통과 사회분위기는 문화예술도시로서의 명맥을 되살려 놓았다. 그러나 서베를린은 연간 1백20억마르크의 연방보조로 지탱하는 기형도시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병역면제와 세제혜택ㆍ생활보조금 등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인구는 감소해 왔고,주민의 13%를 차지하는 외국인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는 상태였다.
통일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상황에서 서베를린인들은 다른 서독 도시 여행을 『서독에 간다』고 표현하는 의식을 형성해 왔다.
베를린 장벽붕괴는 베를린의 지위와 독일인들의 인식을 순식간에 변모시켰다. 베를린은 갑자기 동베를린 인구 1백80만명을 합쳐 인구 4백만명의 거대도시로 부각됐다. 동독뿐 아니라 동구전역에서 몰려드는 쇼핑인파는 베를린을 모스크바와 파리사이의 최대 상업중심지로 부상시켰다. 그리고 곧이어 다가온 통일논의는 베를린이 과거 통일독일의 수도였음을 새삼 깨닫게 했던 것이다.
13세기 슈프레강과 하벨강이 만나는 늪지 위에 형성된 고도베를린은 중세이전부터 「동서유럽의 교차로」로 불려 왔다. 베를린은 중부유럽의 교역중심지인 동시에 프러시아제국 시절에는 동방정복의 전초기지였다.
1871년 비스마르크가 최초의 통일제국을 완성,베를린을 수도로 정했을 때 이미 베를린은 인구 1백만명의 유럽 최대도시로 제국의 영광을 상징했다. 독일제국의 번영과 함께 1905년 인구는 2백만명을 넘었으며 1902년 이미 최초의 지하철이 건설됐다.
1차대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독일제국의 황금기 1920년대에 베를린은 유럽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금융ㆍ상업의 중심지로서 21년에는 하벨강을 따라 18㎞의 고속도로가 건설됐다. 24년 템펠호프공항의 완공으로 베를린은 「유럽항공의 교차로」란 칭호가 추가됐다. 지난해 11월 동서베를린인들의 환호가 물결쳤던 브란덴부르크문과 운터 덴 린덴거리는 독일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퍼레이드 행로였다.
이 황금기에 베를린에는 20개의 연주홀과 35개의 극장이 있었으며 1백50여개의 신문이 발행됐다. 베를린인들은 베르톨트ㆍ브레히트의 연극과 마를레네ㆍ디트리히의 노래속에 문화ㆍ예술의 첨단을 자부했었다.
히틀러의 「천년제국」의 꿈이 참담한 패전으로 끝났을 때 베를린은 8만명의 사체가 널린 폐허로 변했다. 전전 4백30만이었던 인구는 2백80만명에 불과했다. 브란덴부르크문을 중심으로 동쪽 제국의 심장부는 소련군이,서쪽의 쿠르피르 스텍담등 상업지역은 서구연합군이 분할 점령했다. 그후 소련의 「베를린봉쇄」와 장벽구축 등으로 베를린이 냉전의 전초선으로 전락하는 동안 독일인들은 초대총리 아데나워가 살던 라인강변의 소읍 본을 「민주주의의 산실」로 자족하는 듯 했다.
통일수도문제가 제법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킬 당시 한스ㆍ다니엘 본 시장은 『독일은 절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인구 30만의 임시수도로 만족할 것을 주장했다. 콜 서독 총리도 대통령과 외교관만 베를린으로 옮기고,의회ㆍ행정부는 본잔류를 지지하고 있다. 결국 통일조약은 베를린을 수도로 선언하면서,의회ㆍ행정부이전 여부는 통일의회의 결정에 맡겨놓고 있다.
일부에서는 행정부는 본에,대법원은 카를스루에,연방은행은 프랑크푸르트에 두는 식의 국가기능 분산은 유럽에서 가장 연방화된 독일로서는 자연스럽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주장이 오래갈 것으로 믿는 독일인들은 많지 않다.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는 독일국민의 3분의2가 수도와 행정수도의 분리를 원치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 논쟁 자체부터가 독일인들의 통일을 앞둔 「절제」과시용인 인상도 짙다. 본에 건설중이던 3억8천만달러짜리 의회단지 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연방공보센터등 정부청사 건설은 보류됐다. 각국 대사관들도 신축계획을 취소했다. 첫 통일의회가 열릴 서베를린 제국의회는 내부수리에 4백만마르크를 들였다. 10월3일 0시 소멸될 동독 정부는 통일후 수도 베를린의 중심이 될 운터 덴 린덴 등 「슈타트미테」시 중심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있다.
동서베를린이 통합되면 그 경제력만도 5∼10년내에 벨기에와 필적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 베를린에는 1백80개의 연구소와 1만3천명의 학자들이 있고,베를린 자유대학과 동베를린 훔볼트대 등 최고수준의 대학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동ㆍ서 양쪽이 경쟁적으로 복원ㆍ신축한 3곳의 오페라하우스,29개 박물관 등 유럽 어느도시도 따르지 못할 문화예술기반을 갖고 있다.
발터ㆍ몸퍼 서베를린 시장은 『중력중심은 라인강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독일전체가 서유럽에서 동구로 몸무게를 옮기고 있는 지금,동ㆍ서유럽의 중간지점에 있는 수도 베를린은 다시 「유럽의 중심」으로 복귀할 것이란 선언이다.
초대 서베를린시장 에른스트ㆍ로이터의 『세계인들이여 베를린을 주목하라』는 외침은 독일통일과 함께 새롭게 메아리치고 있다.<베를린=강병태특파원>베를린=강병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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