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소 빠른 접근ㆍ개방외압 맞대응/남북대화 세 불리 역전기회 계산도북한의 갑작스런 대일 수교제의는 국제고립을 벗어나려는 외교적 측면과 심각한 경제난을 해결해보려는 「돈」의 필요성 때문으로 풀인된다.
북한은 지난 6월 한소정상회담과 오는 11월로 다가온 한소 수교에 배신감과 충격을 느끼고 있으며 북경아시안게임을 계기로 한 한중관계 급속진전에 초조감을 보여왔다.
때문에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의 대미ㆍ일 정책변화를 예상했었지만 이번에 북한이 지금까지 반대해온 「4대국 교차승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일본 수교를 정식 제의한 것은 솔직히 『놀랍다』고 밝히고 있다.
즉 북한의 빠른 행보는 더이상 「두개의 조선」 반대정책이 국제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명분 때문에 실리는 놓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강인덕 극동문제연구 소장은 민주조선 9월19일자에 김영남 외교부장이 지난 9월초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에게 항의한 6개조의 비망록을 공개한 점을 들어 한소 수교에 대한 불쾌감이 일본과의 빠른 관계개선 움직임으로 나타났다고 보고 있다.
또한 북한는 지난해 동구의 한국 수교에 이어 오는 10월3일 나타날 통일독일공화국에 『대사관계가 안되면 영사관계라도 유지해달라』는 부탁을 했으나 이것마저 거절당하자 격심한 국제고립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를 타개키 위해 우선 대미 관계개선을 노력해왔으나 북경에서의 12차례 접촉에서도 미국이 ▲남북대화의 성의있는 자세 ▲국제테러 행위 포기 ▲핵안전협정 체결과 핵사찰 수용 등을 전제로 내세워 큰 진전을 보지 못하자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원하고 있는 일본쪽으로 눈을 돌렸다는 분석이다.
두번째로 북한은 당장 「돈」이 필요하다는 것. 북한은 일본에 대해 지난 83년 이래 현안이 돼 있는 후지산호 선원 2명의 석방이라는 카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대화의 빌미를 만들기는 수월했다.
북한은 지난해 외채규모가 67억8천달러로 무역 총액 47억9천달러를 20억달러나 상회하고 있다. 게다가 소련으로부터 매년 4억달러어치의 원유를 수입해야 하는 형편에 외채지불 독촉까지 받고 있어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이러한 경제곤경은 북한의 「자존심」과 체면을 희생하고서라도 일본쪽으로 얼굴을 돌리게 만들었다.
북한은 우선 일본으로부터 빌린 6백억엔에 대해 탕감을 요구할 것으로 보이며 일본 정부쪽에서 지난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한국에 지불한 배상금 5억달러를 달러화인플레에 맞춰 50억달러 정도로 함께 요구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은 이와 함게 남북대화와 통일 문제에도 세 불리의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하고 있다.
지난해말 동구의 민주화와 올해 한소 접근,북경아시안게임을 계기로 긴밀해진 한중관계로 한국의 국제적 위치가 상대적으로 훨씬 올라있고 미일을 비롯해 소련 중국으로부터의 대화압력이 목을 죄어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북한은 정권 창립일인 9ㆍ9절과 당 창건일인 10월10일을 전후해 제1ㆍ2차 고위급회담을 열어 통일분위기를 고조 시키고 일본으로부터 공식사과를 받아내 대대적인 대내선전을 강화할 전망이다.<남영진 기자>남영진>
□북한ㆍ일본관계 일지
1948ㆍ9 북한 정부수립
1955ㆍ10 일,북한과 정부간 교섭 일체중단 결정
1963ㆍ9 일 사회당 대표단 최초로 방북
1965ㆍ6 북한,한일 국교정상화 무효주장
1970ㆍ3 일여객기 요도호 납치사건
1972ㆍ1 일 정당대표단 최초로 방북
1972ㆍ3 일,북한국적 재일동포 재입국 허가
1977ㆍ5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표단(단장 현준극) 방일
1983ㆍ11 일,랑군사건 관련 대북제재,후지산(부사산)호 사건
1985ㆍ1 일,대북 제재조치 해제
1987ㆍ9 도이(토정) 일 사회당 위원장 방북
1987ㆍ10 일 관광객 최초로 북한방문
1988ㆍ1 일,KAL기 폭파사건 관련 대북제재 조치
1988ㆍ9 일,대북제재 조치 해제
1989ㆍ1 북한 노동당 대표단 최초로 방일
1989ㆍ3 다케시타(죽하) 일 총리,북한에 전제조건 없는 대화촉구
1990ㆍ9 일 자민ㆍ사회당대표단 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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