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아침 평민당 김대중총재는 인재 물난리의 책임을 물어,몇몇 장관을 파직하도록 정부에 요구했다. 과연 19일 아침 노태우 대통령은 건설부와 농림수산부 두 장관을 전격 경질했다. 대통령의 결심은 이 전날 18일 저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지난 문책개각 경위의 선후는 분명 이러하다. 야당 총재가 문책을 먼저 주장했고,이를 받듯 대통령이 개각을 단행한 것이다. 그렇다고 제1야당 총재의 한마디는 역시 중천금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아무리 제1야당 총재라도,장외의 목소리는 그처럼 허한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마 이 경위에서 돋보인 것이 있다면,대통령과 야당 총재가 수재문책의 필요를 공감했다는 사실,그리고 야당 총재가 이 문제를 제기한 시점 그 타이밍 감각의 절묘함 뿐일 것 같다.
그러나 국민들,특히 수재민들이 그같은 감각적인 개인 플레이를 반겼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바람은,제1야당 70여의원이 체중을 한데 모아서 인재를 당한 딱한 처지와 분한 마음을 반영하는 의정 활동에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물난리가 인재였음을 입증하고 관계장관의 자책사임을 요구했어야 정치의 회생도 가능했으리란 것이다. 이런 때 제1야당의 당론과 국회의 국무위원 해임 건의권을 업은 장내의 목소리는,그것이 비록 초선의원의 것일지라도 총재의 장외 「한말씀」보다 무게가 훨씬 더 나간다. 장내와 장외의 허하고 실함은 이렇게 다른 것이다.
비슷한 경우는 또 있다. 지난 17일 증권시세는 지수 570 아래로 떨어졌다. 6공 발족직전 88년 1월 수준이다. 때맞추어 김총재는 대통령에게 공한을 보내 증시안정대책을 촉구했다. 과연 다음날 18일 정부는 2조원 규모의 주식형 펀드를 설정한다는 증시부양책을 발표했다. 역시 제1야당 총재의 공한이 지닌 천금의 무게가 아니라 그 타이밍의 묘가 돋보일 뿐이다.
그사이 김총재는 증시동향에 매우 민감했다. 5ㆍ16직후 정치휴업때 증권투자를 해본 경험을 털어 놓기도 했다. 이점에서 김총재는 노대통령과 어떤 공감을 나눌 수가 있을 것도 같다.
노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88년 4월21일의 공직자 재산공개때,5개 시중은행의 주식 1만4백40주,그때 시세로 1억3천5백만원어치를 보유하고 있음을 밝혔었다. 당시 627.92이던 종합주가지수는 작년 4월1일 1007.77을 고비로 지금은 560대로 떨어졌다. 최고 시세를 기준한다면,그사이 노대통령의 증권자산은 어림잡아 근 1억을 등락한 셈이 된다. 공을 떠나서도,증권은 두사람 사이에 공동관심사이기에 족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공감과 타이밍이 정치의 모두라면 우리 정치를 걱정할 까닭이 없다. 국민들,적어도 절박한 처지의 증권투자자들의 바람은,제1야당이 당론으로 증시대책을 세우고,이를 국회 고유의 권한을 통해서 정부시책에 반영하는데 있었을 것 또한 틀림이 없다. 장외의 공한보다는 장내의 공론이 아쉽다는 것이다.
더 딱한 것은 제1야당이 장외에 머무는 몇달사이,제1야당의 총재가 93년 다음 대통령 선거의 야권 단일후보를 말하고 있는 사이에 급변한 세상돌아감새다. 그야말로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들이 잇달고 있는데,진정 여ㆍ야의 공감과 대처의 타이밍이 끽긴한 사안들에서 마저 공론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 아는 일이라,그 사이 큰 변화를 다 꼽을 것은 없다. 하지만 남북관계와 북방외교의 급진전을 제1야당이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을까. 페르시아만 사태의 분담금 4억5천만달러와 한국군의 파병설까지 나오는 마당에 야당은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때의 공론을 위해서 우리는 야당에 표를 주었던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 분담금과 파병문제를 놓고,미국 정부와 의회가 주거니 받거니,차치고 포치고 하는 모양을 보노라면,개점휴업중인 우리국회가 한심하고,장외를 맴도는 우리 야당이,그보다는 그들을 쳐다 볼 수 밖에 없는 우리 국민들이 딱하다.
그 국민들 어깨 위에 덧 얹히는 사상초유의 올 추경 4조7천억원(1차 1천9백억원ㆍ2차 2천8백억원)과 27조원이라는 새해 팽창예산의 짐을 모른척하는 야당을,언제까지 「우리야당」이라 아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안타까움을 접어두고,제1야당의 장외투쟁을 성원할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있을까.
정치란 본디 속이 깊다. 그래서 정치는 정치 프로의 영역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아마추어가 보아도,야권통합이 물을 건너 간 지금,제1야당이 갈 길은 뻔한 것 같다. 그길의 하나는 선등원ㆍ후협상,다른 하나는 선협상ㆍ후등원이다. 이중 야당의 선호가 선협상에 있음은 당연할 것도 같다. 하지만 여기에만 집착하는 것은 배수의 진을 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협상이 깨졌을때의 선택이,정권 타도투쟁,헌법을 뛰어넘는 투쟁말고 달리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정치의 파장이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선등원 뿐이다. 정치 깊은 곳에서 어떤 선보장이 있다면 일은 더 수월할 것이지만,이때도 선등원의 명분이 문제로 남는다. 그렇다고 그 명분을 정부ㆍ여당 쪽에 구걸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야당 스스로 그 명분을 찾는 길 밖에 없다. 그 길은 정치적인 상황판단과 결단으로써만 열릴 수가 있다.
사전에 보면 명분에는 두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반드시 지켜야 할 직분」(Moral Duty=도의적인 의무)이요,다른 하나는 「표면적인 구실」(Justification=정당화)이다. 지금 야당의 등원명분이 후자의 뜻이라면,그것은 차원이 너무 낮다. 오히려 제1야당은,우리가 국회의 실질적인 주인이며,그렇기 때문에 등원은 야당의 당연한 직분이라는 전자의 뜻에서 등원명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작금 나라 안팎의 굵직굵직한 사안들이 그 명분을 더욱 강화하고 있음을 모든 국민이 알고 있다.
그래서,특히 김총재에게 호소하고 싶다. 제1야당으로서 무조건등원 이상의 등원명분이 다시 없음을,선협상 대상인 내각제ㆍ지자제는 일단 국민 여론에 맡기는 것이 현명함을,여론과 함께 한다면 선협상 이상의 효과를 후협상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것임을.
격변하는 세계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추석연휴ㆍ보선 등을 기다릴 틈이 어디 있을까. 이런때야말로 국회를 즉각 정상화하는 여ㆍ야의 공감과 타이밍의 묘가 아쉬운 시점인 것이다.<상임고문ㆍ논설위원>상임고문ㆍ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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