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사회민주당의 창설/안병영 연세대 사회과학대교수(정치진단)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사회민주당의 창설/안병영 연세대 사회과학대교수(정치진단)

입력
1990.09.20 00:00
0 0

◎노조의 정치참여통해 뿌리 내려야얼마전 국내신문 한 구석에 전 오스트리아 총리이며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탁월한 지도자의 한 사람인 부르노ㆍ크라이스키의 부음이 실렸다. 그 기사를 보며 문득 빌리ㆍ브란트가 떠올랐다. 브란트는 몇년전 스톡홀름에서 자기 부인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다가 괴한의 총격을 받아 비명에 간 전 스웨덴 수상 울로프ㆍ팔메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하여 「나의 사랑하는 어린동생」의 죽음이라고 울먹였었다. 그가 이번에 그의 또 하나의 평생동지인 크라이스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브란트,크라이스키,팔메는 유럽 사회민주주의운동의 불세출의 삼걸이다. 그들은 1970년을 전후해서 거의 비슷한 시점에 세 나라의 총리가 되어 적게는 5년,길게는 13년간의 재임기간 중 이들 나라를 세계의 대표적인 민주복지국가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고 서로 힘을 모아 동서화해와 남북협력에 앞장서 세계평화증진에도 큰 몫을 했다. 세 사람의 동지적 우애는 유별난 데가 있었는데,브란트 회고록을 보면,그가 1976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의 의장직을 맡게 된 것도 두 사람의 권유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가 「브란트보고서」로 유명한 UN 남북위원회 의장으로서 큰 성공을 거둔데도 두사람의 도움이 매우 컸다. 한때 브란트와 크라이스키가 나치의 폭정을 피해 스웨덴에 망명했던 사실도 아마 이들 세사람을 가깝게 엮어주는 정서적 매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세사람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들간의 도타운 우정이 아니라 그들이 공유하는 정치적 이상과 그 실천에 있다. 그들이 이미 총리직을 떠난지 오래 되고,서독의 경우 이미 사민당이 권좌에서 물러난지 오래됨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오스트리아,그리고 서독의 오늘의 모습에서 이들 세거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는 것은 바로 이들이 사회민주주의의 이상추구를 통하여 민주와 복지,그리고 세계평화를 함께 구현하는데 그들의 삶을 불살랐기 때문이다.

우선 그들은 철저한 민주적 사회주의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 세사람은 1951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창설한 프랑크푸르트대회의 기조선언에 천명된 명제,즉 「자유없이 사회주의가 있을 수 없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통하여 실현될 수 있으며,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통해서 완성될 수 있다」를 몸소 실천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그들은 세나라의 사민당들이 교조적 마르크시즘과 계급정당의 잔영을 떨쳐버리고 대의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좌파 국민정당으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관용과 개방을 앞세우는 이들은 이제 이른바 부르주아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는데 크게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 세 나라 어디에서도 공산당은 정치적으로 아무런 의미 없는 세력으로 전락했다.

무엇보다 이들 세나라의 사회민주주의가 성취한 가장 빼어난 정치적 성과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모범적인 복지국가를 건설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나라들은 한결같이 온 국민의 삶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빈틈없이 보살필 수 있는 거의 완벽한 사회보장체제를 구축하고,사회정의와 사회적 형평에 입각한 소득분배체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모든 개혁을 자유민주적 정치과정을 통하여,그리고 시장경제체제내에 내재한 생산성과 능률성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이룩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나라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높은 수준의 생산성과 아울러 경제적 평등을 추구해온 독특한 발전유형을 보여준 셈이다.

그런가 하면 브란트,크라이스키 그리고 팔메,이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새기념비적 인물들은 한결같이 뛰어난 국제적감각의 소유자들이었고 무엇보다 세계평화에의 기여자였다.

브란트는 동방정책으로 오늘의 독일통일의 길을 열었을 뿐 아니라 전술한 남북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함께 살아남는 문제에 헌신했고,크라이스키는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과 중동문제에,그리고 팔메는 군비축소와 비핵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의 인식의 지평은 항상 계급과 국경을 넘어 「새로운 세계질서」와 「인류공동의 미래」로 뻗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최근 고르바초프가 자주 인용하는 「전인류적 차원의 관심」의 소유자였다.

이들 세사람의 정치역정과 그 성과를 되돌아보자니 자연 관심은 다시 우리문제로 되돌아 온다. 민주ㆍ복지ㆍ세계평화가 합주하는 큰 정치를 살피다가,여야가 등원문제로 줄다리기를 하며 공연한 말싸움만 하는 우리네 정치를 돌아보면,한편 부끄럽고 짜증만 난다. 그러던중 최근 노동조합의 정치참여가 쟁점으로 부상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위에서 논의한 여러나라의 노동운동사를 보면,사회민주당과 노조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양자는 지도부의 인적 중첩,선거지원,집단적 멤버십,공동캠페인,정치교육 등을 통해 상호협력하는 과정에서 함께 발전해 왔다.

그러나 당은 국민정당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노동계급 및 노조라는 정치적 범주를 뛰어 넘게 되고,노조 또한 사민당을 집권당으로 키우기 위해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노조는 아직 이들 정당의 가장 믿음직한 정치고객이며 따라서 양자간의 기본적인 관계는 존속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노조없는 당이나 당 없는 노조는 정치적으로 존립이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경우도 혁신정당이 제도권 안에서 건실하게 클 수 있기 위해서는,또 노조가 경제인 단체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정치 참여가 마땅히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정당이 노조와 제휴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그것은 자유와 평등,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를 공히 중시하며 계급적 관심을 뛰어 넘어 국민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회민주계의 정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세계적으로 번지수도 없는 극단적 이데올로기를 천명하며 「세우기」보다 「부수기」에 급급한 무책임한 정치세력은 민주노조의 걸림돌이 될지언정 그 요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민주노조가 민주정당과 바르게 결연될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보다 발전된 차원으로 성숙될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