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국민의 열화같은 분노의 소리를 전해야겠다. 갑작스런 집중호우로 수해를 입은 이재민은 물론 온국민이 한숨과 걱정속에 복구에 나서고 있는 동안 필자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도대체 정치인들은 뭣하는 사람들입니까. 주민들이 졸지에 가족을 잃고 집과 논 밭이 유실되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국회는 팔짱만끼고 있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치인들이야말로 이번 홍수에 떠내려 갔어야만 옳았습니다』『어차피 국회의원들이 등을 돌려 기능을 못하는 국회라면 차라리 잘됐습니다. 국회를 1년간 쉬고 대신 올해 예산 8백여억원을 수해복구비로 쓰는 것이 백번 국민의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국회를 해산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
고양군 일산에 산다는 한 수재민은 악에 받친듯 울분을 토했다. 『그동안 무위도식하며 빈둥빈둥 지내던 정치인과 지도자들이 뒤늦게 수해현장에 몰려다니는 것은 정말 꼴불견입니다. 이러고도 대권을 꿈꾸고 표를 달라고 할 것 입니까. 그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해 주십시오. 하나도 반가워할 사람이 없으니 오지 말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건국 이후 요즘처럼 정치지도자와 국회의원들이 국민들로부터 분노와 지탄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정치와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극에 달하면 어떤 현상을 보이는 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임시국회에서 민자당의 날치기 의안통과와 이에 반발하여 야당이 국회를 뛰쳐나가 정치와 국회가 표류ㆍ파행된지 석달,나라 안팎에서는 걱정스런 사태와 문제들이 잇달아 밀려왔다. 중동사태석유파동 물가앙등과 수출부진,임박한 우루과이라운드 그리고 수해 등 그야말로 첩첩산중격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꿈쩍도 않고 있다.
지도자들간의 뿌리깊은 감정과 경쟁의식ㆍ대권욕심 그리고 체면때문에 난국수습과 정국정상화 노력은 아랑곳 없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1950년대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자유당의 독주와 횡포에 대해 야당을 이끌고 분연히 맞섰던 유석 조병옥박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54년 11월29일 자유당이 바로 2일전 스스로 부결을 선언했던 개헌안(이승만 대통령 출마제한 철폐)에 대해 사사오입의 억지론을 들어 번복선언을 했고 야당은 불법무효를 주장하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자유당이 가결을 강행하자 당시 민국당 사무총장인 조박사는 『자유당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역사와 국민이 보이지 않는가. 천인공노할 이번 불법행위는 두고두고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일장연설을 한 뒤 야당의원들을 인솔,퇴장했다.
그러나 조박사는 4일 후 국회등원을 선언했다. 당시 대다수 야당 및 무소속의원들은 자유당 독재에 항거표시로 의원직을 사퇴,국민과 함께 거리투쟁에 나서자는 강경론을 폈으나 조박사는 『야당마저 국회를 등지면 이나라에는 암흑이 도래한다. 이럴수록 우리는 국회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의회민주주의를 사수하여 자유당의 독재를 막아야 한다』고 역설,의원들을 설득시켰다. 그로부터 꼭 4년뒤인 58년 12월 자유당이 무술경위를 동원하여 야당의원들을 강제로 내쫓고 단독으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이른바 24파동때도 조박사는 국회는 「민주주의의 보루」라며 오히려 대 여당 규탄과 동 법안의 무효투쟁을 위해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하는 등 국회를 통한 대여 적극투쟁을 벌였다. 역사는 국회를 지킨 조박사의 판단이 적절히 옳았음을 입증했다.
하기야 30여년전과 오늘의 정치적 상황과 환경은 크게 다르지만 예나 이제나 정치인들이 어떤 일이 있어도 의회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철칙이요,또 국민의 엄숙한 명령인 것이다.
긴 얘기 할 것 없이 필자는 김대중 평민당ㆍ이기택 민주당 총재에게 다시한번 간곡히 당부하고자 한다. 내일부터라도 당장 국회에 자진 등원해서 국회와 정치와 야당이 본격적으로 제구실을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회해산총선거,내각제개헌포기,지자제실시,날치기통과 관계자인책 등 5개항을 등원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던 김대중 총재가 지난주 조건을 개헌포기와 지자제 등으로 압축시키고 또 이달안에 등원 여부를 매듭짓겠다고 자세를 완화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완화에 대해 대다수 국민들은 별다른 감동도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가앙등 경기침체 농정위협 수해 등으로 저마다 아우성인데 등원에 무슨 조건인가. 국가와 국민의 이해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어디있는가. 개헌과 지자제도 막중한 문제이지만 국민의 호응없이는 저지도 추진도 어려운 것은 자명한 일 아닌가.
야당으로서는 왜 오늘의 등원 거부의 근원적 책임이 우리에게만 있는가고 항변할지 모른다. 필자가 야당에 즉각 등원을 또다시 촉구하는 것은 야당에 거는 기대,거여와 정부의 독주를 견제해 주기를 국민은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야당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1백여일간 열리는 정기국회는 연중 가장 중요한 국회이다. 국정감사를 통해 지난 1년간 나라살림의 허실과 당부를 점검하고 지난해 예산집행상황을 결산하며 각종 법안과 함께 국민부담과 직결되는 새해 예산을 심의하는 것이 주업무다. 그러나 올해 경우 석유파동과 수해 우루과이라운드 등에 대한 적절한 대책마련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야말로 매일 야간국회를 열어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금싸라기같이 귀중한 시기인데 야당의 등원이 내달초에나 점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깊이 재고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정치의안에 대한 협상으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뒤 정기국회 막바지에 등원,예산안과 각종 법안에 대한 정밀심사시간이 촉박하여 허겁지겁 통과시키는 우행을 재연할 가능성이 크다.
야당은 하루빨리 등원해야 한다. 이것 저것 재고 명분과 체면만 따지다가 마지못해 여론에 등을 밀려 들어갈 경우 장차 국민의 따가운 시선과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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