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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환국(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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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환국(사설)

입력
1990.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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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이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계승에 있음을 선언한 것은 아홉차례에 걸친 헌법개정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전통이다. 지금의 아홉번째 개정헌법에서도 여전히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하고 있다.그런데도 광복 45년째가 되고서야 지난 13일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선생의 유해를 비로소 모셔왔다. 이날 김포공항에는 중국 흑룡강성으로부터 선생의 유해와 함께,선생의 당숙 이승화선생,동생 이봉희선생,조카 이광민선생 내외분 등 모두 5위의 애국지사가 말없는 귀국을 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이역만리 만주땅에서 목숨을 바친 석주선생 일가가 말없는 유골이 되어 돌아오던 날,공항 대합실에서는 일반 해외여행자 가족까지 합쳐 5백여명이 만세 3창을 외쳤다고 했다. 광복 45년 만에야 돌아오는 이 애국지사 일가의 「환국」치고는 좀더 당당한 의식이 있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침 65년 만의 물난리로 전국에 걸쳐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새삼 「임시정부의 법통계승」이 빛바랜 구호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결의를 다짐하지 않을 수 없다.

임시정부가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고친 뒤 첫 국무령으로 추대됐던 석주선생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찍이 경북 안동의 명문에 태어났던 선생은 을사보호조약에 의병의 깃발을 올리려고 시도했고,대한협회에 참여해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 서기도 했다.

선생이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만들기 위해 만주땅으로 간 것은 53세때인 1911년초였다. 1932년 선생은 눈을 감으면서 『나라를 다시 찾기 전에는 뼈를 고국에 묻지말라』고 일렀다고 한다.

쓸쓸한 선생의 유해봉환에 접하면서 우리는 아직도 해외 각국에 버림받은 채로 묻혀 있는 독립운동지사들에게 생각이 미치게 된다. 이중에서 중국 상해에 묻혀있는 임시정부 3대 대통령 박은식,군무총장 노백린,외무총장 신규식 그리고 안태국선생 등 네분에 대해서는 지난 83년부터 광복회와 유가족들에 의해 국내봉환이 추진돼 왔다.

이밖에도 보훈처에 의해 확인되고 있는 해외 순국선열은 중국의 81위를 비롯해서 소련 8위,미국 3위,일본 1위 등 모두 93위에 이르는 것으로 지난 1월 밝혀졌었다. 대체로 중국ㆍ소련 등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지역에 묻힌 선열들이 대부분이다.

근래 소련과는 정식수교까지 내다 볼만큼 됐고 중국과의 교류폭도 비정치적인 분야에서 급격하게 늘고 있다. 정부는 독립운동 선열들을 더 이상 이역만리에 버려두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인 4월13일 정부주관의 기념일로 지정한 것이 올해 들어서야 이루어 졌다는 사실도 새삼 반성해야 될 것이다. 김구선생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이 묻혀 있는 서울의 효창공원에 대해서도 대한국민의 법통의 근원답게 성역화 사업을 펴야할 것이다. 석주선생 일가의 말없는 환국이 우리의 오늘을 있게한 위대한 선열들을 정당한 자리에 모셔야 된다는 각성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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