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폭우가 서울을 강타한 9월11일의 출근길은 끔찍했다. 길어도 1시간이면 될 거리를 4시간 넘게 걸려 출근하면서 나는 실컷 사람구경을 해야 했다.택시는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좌석버스 종점으로 가보니 사람들이 엉성하게나마 줄을 선 상태로 모여 있었다. 45명 정원에 10여명을 더 태운 좌석버스는 9시께 출발했으나 그때부터 시행착오가 시작됐다. 좌석에 앉아 잠이 들었다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깼을때 차는 엉뚱한 도로에 서 있었고 40분이 지났는데도 정류장 세구간을 간 정도였다.
침수된 정규노선을 포기하고 암사동 강변도로를 통해 천호대교 인터체인지로 올라가려 했으나 도로가 통제돼 꼼짝 못하는 상태였다. 승객들은 강물을 내다보면서 『야아』,『어머어머』하고 놀라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위기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가는가 궁금했다.
『거 라디오 좀 틉시다』 뒷좌석에서 어떤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라디오가 고장나셨어요』 운전사의 미안감섞인 대답에 승객들이 와 웃었다.
방송을 듣지 못해 도로상황도 모르는 채로 버스는 오던길을 겨우 되돌아가 올림픽대로에 올라섰다. 그러나 또 길이 막힌 것을 알게 된 운전사는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거 차고로 들어가삐나』경상도남자가 중얼거려 또 웃음이 터졌다.
4∼5명은 내려버렸다. 그중 어떤 사람은 라디오도 안고치고 다닌다고 화를 냈다. 승객들은 종점정류장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이 차를 타라고 손짓해 불러 들이기도 했다. 버스가 길동 4거리쪽으로 갈 때 어디로 어떻게 가려는가를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천호동 사거리에서 천호대교가 밀리는 것을 본 운전사는 잠실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또 차를 되돌려야 했다.
비는 한풀이 하듯 끝없이 내렸다. 앞 좌석의 남자는 『에잇 못참겠다』하더니 차창을 빠끔히 열고 그곳으로 담배연기를 뿜었다. 승객들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도로상황에 관해 똑같은 얘기를 자꾸 나누고 있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큰일 났네』를 연발하며 발을 굴렀지만 그 와중에 옆사람에게 고개를 기울인 채 계속 자는 승객도 있었다. 중간에 내리면서 환불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겨우겨우 천호대교를 넘어선 것이 낮 12시15분. 종로 1가까지는 또 1시간이 걸렸지만 승객들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승객들은 내리면서 운전사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운전사도 너무 늦어 죄송하다고 대답했다.
줄을 서려 하고 차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으려 애쓰고 남을 도우려 하고 당황하지 않으려 하고 직무를 다하려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왠지 안심이 됐다. 4시간의 출근은 조바심나고 고통스러웠지만 질서와 신뢰의 싹을 확인한 사람구경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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