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의 유신 말기였던가,80년대초였던가. 에드원ㆍ라이샤워는 『한국은 위대한 선비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한 국내신문에의 기고에서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군사독재의 억압속에서 기가 죽어있던 한국민에게 용기와 자신을 주는 충고였다. 그 라이샤워가 1일 일흔아홉의 나이로 미국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미국의 동북아정책에 큰 힘을 썼던 기둥이 사라진 것이다. ◆라이샤워라면 무엇보다도 일본에 정통한 전문가로 통한다. 일본에서 태어나,일본여성과 결혼했고,61년부터 68년까지 주일대사를 지낸 경력으로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가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도 일본의 당나라 유학승이었던 「자각국사 원인의 연구」였다. 태평양전쟁때에는 육군에서 정보장교로 활동했고,그 뒤 국무부로 옮겼다. ◆그러나 라이샤워는 미국의 지식인사회에 많지 않은 우리의 친구였다. 그는 미국의 어느 극동전문가보다도 한국의 역사에 정통하고,또 한국의 문화전통을 존경했었다. 그의 학위논문인 「원인연구」도 사실은 통일신라때 중국 산동반도의 「신라방」과 장보고에 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37년 두달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한국에 눈떴다고 그는 고백한다. ◆이때 한국어의 로마자표기법으로 소위 「매퀸ㆍ라이샤워표기법」을 고안했던 그는 그 뒤 『줄곧 한국인에 대한 지지자가 됐다』고 회고 했었다. 그는 또 오늘날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은 『지난날 역사의 연장일 뿐 결코 놀랄일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5ㆍ16쿠데타가 『갓난아기 민주주의를 말살했다』고 비판했고,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격려했었다. ◆미국의 학계에 라이샤워만큼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그는 어디까지나 일본학의 학자였다. 그만큼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역시 일본역사를 과대평가하는 면이 눈에 띈다. 전후 일본복구에 일본으로서는 「백만대군」과 맞먹는 「일본통」이었다. 그의 죽음앞에서 우리는 그래서 더욱 초라한 느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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