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투쟁활동… 인내심 강하고 계획적 후세인/권력 쉽게 장악… 「즉흥ㆍ단기」 일추진 카다피화전 양국면을 오락가락 하는 중동사태의 전망이 불투명한 이유중의 하나는 사담ㆍ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성격과 행동패턴을 서방세계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아랍 전문가들이 많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번 페만사태의 장본인인 후세인과 86년 미ㆍ리비아 충돌사건의 주인공인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정치행태에 대한 비교ㆍ분석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서방측에서는 이 두사람을 가리켜 공통적으로 「미치광이」「망나니」 등 예측 불가능한 위험인물로 묘사하고 이해하고 있으나 둘 사이에는 살아온 내력과 그에 따른 정치스타일에 큰 차이가 있다는게 이들의 설명이다.
우선 후세인은 10대때부터 정치활동에 뛰어들어 20대에 이미 두각을 나타냈고 30대에는 요직을 맡기 시작해 40대에 대통령이 됐다. 후세인이 이처럼 한발한발 권력의 정상에 다가갔다는 것은 그가 인내심이 강하고 계획적이며 명확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후세인보다 5살 아래인 카다피는 애용하는 흰색벤츠와 순백색군복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다혈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이는 그가 후세인에 비해 단기간에 권력을 움켜쥔데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지난 42년 리비아 북부 베두인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난 카다피는 고등학교 재학시 학생데모 주동혐의로 퇴학당한 적이 있긴 하지만 벵가지대 지리학과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카다피는 그후 27세의 젊은 나이에 「자유장교단」을 조직,미국의 측면지원하에 이드리드 친영정권을 몰아내는 무혈쿠데타에 성공,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후세인이 천신만고 끝에 집권한 것과 달리 「싱겁게」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의 정책이나 행동이 무계획적이고 그때그때 임시방편적이며 성급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분석도 있다.
또 처음부터 「아랍의 단결과 통일」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혁명수행의 단계를 밟아온 후세인은 바트당원의 입장에서 조직관리 운영 인사를 익혀왔다.
그런만큼 국민이 무엇을 원하고 어느 것을 두려워하는지 등을 알고 있고 따라서 한편으로 치우친 감은 있으나 지도자로서의 「덕목」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오랜 혁명투쟁으로 혁명정신이 몸에 밴 후세인에 비해 집권논리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카다피가 집권후 「제3이론」이니 「카다피즘」을 내놓고 있는 것을 비교하는 시각도 있다.
측근 참모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며 대의명분에 충실하려는 후세인이 아랍권 일부에서는 칭송을 받는 것과는 달리 카다피는 속전속결을 선호하는 정치성향을 보여 「아랍의 이단자」로까지 불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다만 서방측 시각으로 보면 이들 두인물은 한결같이 돌발적 행동으로 미국등 초강대국과의 정면대결도 불사하는 「기피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랍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후세인은 아랍민족주의에 호소하면서 카다피보다는 한차원 높은 정치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장현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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