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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무총장/황소웅 편집부국장(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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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무총장/황소웅 편집부국장(메아리)

입력
1990.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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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디서나 분쟁이 벌어지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나 총회와 마찬가지로 유엔 사무총장도 「평화의 사도」로서 한몫을 단단히 한다. 유엔헌장 99조는 「세계평화와 안전보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어떤 문제라도 안보리에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다」고 사무총장의 권한을 명문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은 안보리의 제청에 따라 총회가 임명하는 절차만 보아도 무게를 지니는 자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명문규정은 없으나 5년 임기에 한번 중임되는 관례때문에 세계최고 외교관으로서의 경험과 관록을 자랑한다.유엔은 창설 이래 지금까지 5명의 사무총장을 배출했다. 초대(46∼52년)는 트리그브 리라는 노르웨이 외교관이었다.

2대(53∼61년)는 유엔의 대명사처럼 알려졌던 다그ㆍ하마슐드라는 스웨덴 외교관. 한국전이 끝난뒤 중공에 억류된 미국조종사들을 석방하기 위해 중공과 직접 접촉하기도 했고 수에즈 분쟁해결을 위해 중재에 나서기도 했던 그는 61년 콩고 분쟁시 현장밀림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함으로써 사후 노벨평화상을 받는등 더욱 크게 명성을 얻었다. 하마슐드의 뒤를 이어 3대 사무총장(61∼71년)이 된 버마출신의 조용한 외교관 탄트는 미국에 대해 폭격 중단을 요구하면서 월남 평화협상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탄트 후임인 4대 총장(72∼81년) 쿠르트ㆍ발트하임은 중립국인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특히 한반도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79년 5월 평양과 서울을 동시에 차례로 방문하여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무총장 3선을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다가 결국 포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던 그는 86년 오스트리아 대통련선거에 출마,『나치 친위대였다』는 전력 시비를 무릅쓰고 당선되어 또 한차례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켰었다. 그 화제의 주인공이 오스트리아 대통령으로서 26일 페르시아만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바그다드를 방문,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회담했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5대 총장인 현재의 페레스ㆍ데ㆍ케야르가 전임총장인 발트하임의 전격적인 이라크 방문과 때를 같이해서 이라크의 후세인과 회담 한다는 것이다.

4ㆍ5대 유엔 사무총장이 나란히 연쇄 릴레이협상에 나선 셈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케야르총장은 페루 출신으로 외무차관 주소련ㆍ주유엔대사를 거쳐 발트하임 총장시절 사무차장을 지낸 인사로 중임된 10년 임기가 내년에 끝나는데 그동안 이렇다 할 실적은 없었다.

유엔 자체의 권능도 그러하지만 유엔 사무총장의 노력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언제나 한계에 부딪쳐 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번에 케야르의 중재 활동에 크게 기대를 걸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발트하임 자신도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있으면 당사국들이 나서고 불가능할 때만 사무총장에게 일이 떨어지는데 나는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다』고 실토한 일이 있었고 탄트도 『완전한 해결은 없어도 가까운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다』고 스스로 노력의 한계를 자인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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