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권력에… 돈에… 할퀴여온 남산/일 “민족정기 없앤다” 신사 건립/3공땐 개발등 빙자 ⅓을 훼손/뒤늦게 보존작업… 예산ㆍ부처간 협조등 난제는 많아수도 서울 한복판에 푸르름을 가득 안고 우뚝 서있는 남산.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란 애국가 구절에서도 나타나듯 남산은 단순한 서울 한복판의 산이 아니라 민족정기가 깃든 성지다.
해발 2백65m로 그리 높지 않으나 서울정도이래 6백년동안 우리 민족과 숨결을 같이해온 남산은 근대사로 접어들면서 외세와 권력,돈에 의해 마구 파헤쳐지고 여기저기 콘크리트건물이 들어서는등 훼손돼왔다.
남산의 훼손은 민족의 수난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때는 일본인들이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조직적으로 훼손했고 6ㆍ25전쟁 시기와 2ㆍ3공화국때에는 외세의 영향을 받은 권력과 돈,무분별한 개발사업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는 신세가 됐다.
따라서 서울시가 발표한 「남산 제모습찾기사업」은 올해 광복 45주년과 오는 94년의 서울정도 6백주년을 앞두고 서울시민을 위한 도심공원으로서의 기능회복뿐 아니라 자주적인 민족기운을 다시 세워보려는 뜻까지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남산은 조선조 5백년동안 기슭에는 지조있는 선비들이 집단거주한 선비촌이었는가 하면 수도의 방위요충지로서의 큰 중요성 때문에 능선을 따라 성곽이 세워지고 5곳에 봉수대가 설치돼 전국 각지의 봉화신호가 이곳으로 모여드는 성지였다.
구한말 일제는 갑신정변으로 서대문밖 공사관이 불타자 남산근처에 공사관을,을사조약후에는 통감부 건물까지 짓게 돼 외세에 의한 수난사가 시작됐다.
지금의 장충단공원은 고종의 을미사변때 순국한 장수와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 부속건물이 있었던 곳이나 건립직후 조선조를 사실상 통치하기 시작한 일제는 주변에 벚꽃 수천 그루를 심었다.
1906년 일제가 북쪽 일대를 손아귀에 넣어 경성공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2년뒤에는 회현동 일대까지 차지,한양공원으로 개설했으며 강점후인 1920년대에는 예장동까지 넓혀 일인의 주거지역으로 삼았다.
26년에는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봄 가을 나라 제사지내던 곳)을 헐고 경성신사와 조선신궁을 지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제는 남산에 흐르는 민족혼을 차단키 위해 맥이 통하는 곳마다 신사 병영막사 경찰청사 등을 지었다.
일제의 훼손에 이어 광복후에도 자유당정권과 60년대 말∼70년대 중반 소위 「개방」을 빙자하여 산언저리가 마구 파헤쳐져 호텔등 각종 건물이 들어서는등 남산은 마치 콘크리트 병풍에 둘러싸여진 흉한 몰골로 변했다.
57년 이태원 산1의 7 일대 3만3천㎡가 외국인주택 건설용도로 공원에서 해제된 것을 시작으로,58년 동국대를 짓기 위해 2만7천㎡가 또 공원용지에서 해제됐고 5ㆍ16후인 63년 중앙공무원교육원,67년 군장교주택및 재개발,69년 외인아파트 건립 추가용지 해제 등 행정력의 남용에 따른 개발로 남산은 상처투성이가 됐다.
시민 누구나 공분하는 대표적 남산훼손사례는 72년에 건립된 주공외인아파트와 남산맨션아파트.
이들 아파트는 16층이상 고층으로 남쪽능선을 뭉개고 앉아 남산의 경관을 완전히 차단,많은 시민들은 한결같이 『헐어버려야 한다』고 말해왔다.
외인아파트는 법상으로는 공원용지에서 해제된 곳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나 당시 외세와 권력의 압력이 아니고서는 과연 건립이 가능했겠느냐는 지적이다.
맨션아파트의 경우는 공원용지에서 해제도 안된 상태에서 관광호텔로 지었다가 아파트로 용도변경돼 자본과 권력의 개입의혹마저 짙다. 이들 아파트의 부지는 무려 1만4천4백여평에 이른다.
70년에 들어서는 재벌들이 하얏트호텔 신라호텔 타워호텔 등을 지어 남산을 멍들게 했고 이밖에도 이런 저런 연유로 자유센터 어린이대공원 남산도서관 정보기관 국립극장 등 공공건물과 리라국교ㆍ숭의여전 등 각종 학교등이 남산속으로 파고들었다. 따라서 남산의 3분의1에 가까운 25만여평이 합법을 가장,또는 불법으로 잠식당했다.
이러한 남산 잠식의 한편으론 민족정기를 되살리려는 노력으로 김구선생 안중근의사 이준열사 유관순열사의 동상과 기념비가 비집고 들어선 것도 역사성을 지닌다.
이번 「남산 제모습찾기사업」은 지난 6월 노태우대통령의 복원계획수립 지시에 따라 시가 연구계획단을 구성,철저한 보안속에 사업을 추진,40여일 만에 개괄적인 윤곽을 드러낸 것이다.
서울시의 이번 계획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남산훼손과 잠식은 종식되어야 한다는 기본방침의 확인일 뿐 아니라 가능한 한 남산의 제모습을 찾는 작업이 가시화됐다는 점에서 뜻있는 모든 국민들로부터 큰 공감대를 형성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남산 제모습찾기」가 불과 40여일 만에 서둘러 골격을 잡은 탓에 아직 소요예산,제도상의 보완점,관련부처와의 협조 등 앞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사업추진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
특히 이번 사업의 입안과정에서 공청회등 여론수렴과정이 빠져있어 자칫 「남산 되찾기」가 탁상행정식으로 졸속추진돼 또다른 부작용을 낳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최해운기자>최해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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