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민단ㆍ조총련ㆍ시 티격태격/히로시마시,조총련측 「별도비」 예상 「통일비」건립 요구/조총련측 「한국인」대신 「조선반도 출신」주장/피해자ㆍ유족들 “비문수정은 모독”거센 반발지난 45년 8월 6일 히로시마(광도) 원폭투하때 희생당한 2만여명의 한국인 사망자 위령비는 올해도 「평화공원」안으로 이전되지 못한채 또 한해를 넘기게 됐다.
히로시마시 당국으로부터 이전승인을 받고도 비명을 고쳐쓰는 일등을 놓고 민단ㆍ조총련ㆍ히로시마시 3자간에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시는 최근까지만도 공원내에 종합위령비가 서 있는 만큼 다른 위령비는 필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국인 희생자 위령비의 이전에 반대해 왔으나 지난 5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이를 허용키로 한 것.
당시(5월18일) 박병헌 민단중앙단장과 히로시마 시장은 ▲현재 공원밖 모토가와(본천) 강변에 있는 위령비를 공원 안으로 옮긴다 ▲이 설은 8월6일까지 끝낸다 ▲구체적 방법은 시가 중심이 돼 민단과도 협력한다 ▲정치적 이해를 배제하고 인도적 관점에서 추진한다는 등 4개항에 합의했었다.
그러나 시 당국은 민단측의 비가 공원안에 자리잡게 되면 조총련측도 새로운 비를 세우겠다고 나설 것으로 판단,통일비로 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에 따라 히로시마의 유지 8명으로 「한국ㆍ조선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건립 준비위원회」가 결성돼 민단ㆍ조총련ㆍ히로시마시 3자간의 의견조정 및 이전사업 지원업무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전사업은 처음부터 암초에 부딪쳐 한걸음도 진전되지 않았다.
「한국인 희생자」의 넋을 위로한다는 비명을 조총련측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조총련 히로시마 본부측은 『한국인이라고 새겨져 있는 현재의 비문은 통일비로 인정할 수 없다』며 비명을 「조선반도출신 희생자 위령비」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분단 이미지를 줄 우려가 있으므로 2개의 비를 세우는 것은 반대라고 말하면서도 현재의 비가 그대로 이전될 경우에 대비해 자기들도 별도의 비를 세우겠다고 시 당국에 승인 신청을 내두었다.
일본인들 사이에는 「한국ㆍ조선인」으로 표현하자는 의견도 나왔고,국명을 빼고 한글로 「추도」라고만 새기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피해자들과 희생자 유족들이 이같은 논의에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비문을 한 자도 수정해서는 안된다. 만일 수정해야 한다면 공원안으로 이전할 것이 아니라 고국망향의 동산으로 옮기는 편이 낫다. 일본인들이 사죄의 뜻으로 따로 통일위령비를 만들겠다는 소리도 있는 것 같으나 그럴 필요가 없다』 히로시마 시내 고모토(하본) 병원에서 피폭 후유증을 치료 받고 있는 최창기씨(66)는 「한국」이란 표현이 빠지거나 「조선」과 같이 새겨넣는 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분개했다.
비문의 내용을 수정하자거니 못한다거니 하는 논쟁도 끝이 없다. 일본 육군 제2총사령부 교육참모로 재직중 폭사한 이우공의 이름을 희생자의 대표격으로 새겨넣은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해치는 것이며,원폭피해와 아무 관련도 없는 삼전도의 얘기도 빼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 현재의 비문중 강제연행으로 끌려 왔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일본의 책임을 밝힌 부분이 없으므로 이번 기회에 그것을 분명히 해야한다는 소리도 있다.
이토록 이견이 백출하자 히로시마시 당국은 현재의 비를 수정없이 그대로 이전하고,그대신 시 당국이 합동위령비를 세우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민단도 조총련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이토록 팽팽한 대립이 계속되자 3자간의 이견조정에 팔을 걷어 붙였던 민간단체의 핵심멤버들도 손을 들고 말았다. 8인 위원회의 한사람인 도요나가(풍영혜삼랑ㆍ54ㆍ고교교사)씨는 지난 6월21일 위원직을 사퇴했다.
『히로시마시의 의향을 대변한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이전을 허용한 시 당국이 일본인 피해자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사퇴의 변이었다.
민단중앙본부의 한 관계자는 『남북대화보다 더 어렵다. 우리로서는 양보할 의향도 있었으나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반발이 너무 심해 아무것도 의견일치가 안된다』면서 『서두를 것 없이 1년동안 여유를 갖고 내년 8월6일까지 이전키로 목표를 바꾸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별다른 대안이 나올 수도 없고 이해 당사자들의 생각이 바뀔 공산도 없어 이전문제는 한동안 재일한국인 사회의 현안문제로 장기화 될 것 같다.
문제의 비는 1970년 민단 히로시마현 본부가 중심이 돼 동포들로부터 모금한 돈으로 건립한 것으로,히로시마시 당국은 『공원안에 합동 위령비가 있으므로 일체의 다른 공작물은 허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건립승인을 거부,한국인은 죽어서 까지 차별을 당한다는 비판을 불러 일으켰었다.
그후 민단은 해마다 공원내 이전을 요청해 왔으나 똑같은 이유로 거부당해 왔었다.〈동경=문창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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