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재할머니에 건국훈장애국장/남편ㆍ자녀ㆍ사위이어 6번째 훈장/3ㆍ1운동후 중국행… 5월 할복기도 김국빈씨가 손자/김구ㆍ이시영선생등 의ㆍ식 수발/“입북남편 이기쁨 함께 했으면”조국독립을 위해 중국땅을 누빈 광복군가족에 대한 서훈이 45년만에 완결됐다. 남편과 3남매 사위에 이어 6번째로 지각훈장을 받은 96세의 할머니는 길고 험했던 가족의 독립운동사를 정리하는 감회에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정부는 15일 상해임정시절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노영재씨(96ㆍ경기 광명시 철산동 주공아파트 1315동1402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게 된다.
노씨의 가족은 지난77년 외아들 김덕목씨(77년사망)와 차녀 정숙씨(74ㆍ서울 마포구 서교동),사위 고시복씨(6ㆍ25때 전사) 등 3명이 건국포장을 받은데 이어 80년에는 장녀 효숙씨(75ㆍ미LA거주),지난해에는 남북인사인 남편 당헌 김붕준선생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독립투사들이다.
생존하는 상해임정시대의 최고령자로 격동의 현대사를 몸소 겪으며 조국을 지켜보아온 노씨에게 광복절을 하루앞둔 14일 하오3시께 이계순정무제2장관이 김창선광명시장을 대동하고 찾아와 서훈소식을 전하고 평생의 노고를 위로하자 『살아계시면 올해로 1백2세가 되셨을 납북된 남편의 생사를 모르는 안타까움이외에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노씨의 일생은 한편의 장편소설이나 드라마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평남 용강이 고향인 노씨는 16세때 당시 보성전문 3년생이던 23세의 당헌선생을 만난 결혼했다.
1921년 두딸과 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가 3ㆍ1운동후 상해로 망명했던 당헌선생을 만난 노씨는 이때부터 김구 박은식 이시영 안창호선생 등 민족지도자의 식사 의복 등 수발을 하다 40년에는 광복군에 투신,항일투쟁일선에 나섰다.
77년 췌장암으로 별세한 아들 덕목씨는 중국 장개석정부의 첩보기관이었던 「감의사」의 요원으로 일본군의 이동 등 각종정보를 임시정부에 제공했으며 장녀 효숙씨는 광복군 제2지대에서 대일본군 심리전에 참여했다.
차녀 정숙씨는 광복군사령부 방송아나운서겸 의정원속기사로 대일선전포고문 방송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6ㆍ25전쟁에서 연대장과 국방부 초대정훈국장으로 각각 전사한 첫째사위 송면수씨와 둘째사위 고시복씨도 용명을 날리던 광복군 출신이다.
지난5월 일왕의 한민족지배 사과를 요구하며 할복자살을 기도했던 김국빈씨(33)는 노씨의 손자. 김씨는 이날 『할아버지가 해방후 김구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었다』고 감회에 젖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생사를 모르는 할아버지도 기뻐하실거예요. 오래오래 사십시오.』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노씨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귀가 잘 안들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보행이 자유로울 만큼 정정한 편이다.
노할머니는 해방후 덕목씨와 살다 아들이 사망한 이후 79년 LA에 사는 장녀 효숙씨가 모셔갔으나 『조국에 묻히겠다』며 86년8월 귀국,큰손자 임룡씨(38) 집에 살고 있다.
그러나 비디오테이프 판매회사에 다니는 임룡씨 부부는 월수입 70여만원으로 어린남매의 양육비와 생활비를 대느라 쪼들리는 처지에 있어 할머니를 더 잘 모시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같은 아파트단지에 살고있는 며느리 이군옥씨(66)는 『77년 남편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된뒤에도 생계가 어려워 시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룡씨는 『아직 정정하시기 때문에 내일 애국장을 받으신뒤 할아버지가 밀랍상으로 계시는 독립기념관에 모시고 가고싶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이재열기자>이재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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