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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논리」 일관된 행동파/사담ㆍ후세인은 누구인가(세계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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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논리」 일관된 행동파/사담ㆍ후세인은 누구인가(세계의 창)

입력
1990.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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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격한 이미지… 전략은 탁월/청년기 친영 정권항거 애서 망명생활도/강한 권력욕 소유한 「중동의 히틀러」사담ㆍ후세인 이라크 대통령(53)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후세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세계언론들은 대부분 그를 가리켜 「바그다드의 도살자」「중동을 제패하려는 야심가」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라크와 가장 적대적인 이스라엘은 그를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에 비유하고 있으며 미국언론들도 「전쟁광」「아랍의 미치광이」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로 후세인은 어린시절부터 투쟁으로 일관된 인생을 살아왔다.

「사담」이라는 이름이 「투쟁하는 사람」「대결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의미하듯 그는 타고난 승부사의 기질로,「힘이 정의」라는 논리로 일관된 행동을 보여왔다.

지난 37년 4월28일 바그다드북서부 티그리스강변 티크리트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9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멜론농장을 경영하는 숙부밑에서 자라났다.

56년 당시 과격세력이던 바트당에 입당,친영정권에 항거하는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던 그는 22세때인 59년 10명의 동료들과 함께 당시 카림ㆍ카셈총리 암살사건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이집트로 망명했다.

이당시 후세인은 직접 기관단총으로 카셈총리를 공격했으나 경호원만을 사살하고 체포됐으나 격투끝에 탈출에 성공했다.

후세인은 탈출당시 왼쪽 허벅지에 총알을 맞았으나 이를 직접 칼로 빼내고 노새를 탄 채 3백마일이나 되는 사막을 건너 시리아로 도망쳤다.

이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그의 무용담을 듣고 그를 이집트로 불렀다.

이집트에서 4년동안의 망명생활동안 그는 법학을 공부하면서 장래 집권을 위한 원대한 꿈을 키웠다.

63년 바트당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귀국했으나 9개월 후 역쿠데타로 정권이 넘어지는 바람에 체포돼 감옥에 들어갔다. 후세인은 68년 바트당이 쿠데타로 재집권하자 혁명위원회 부의장겸 부통령으로 발탁돼 정치전면에 부상했다.

72년 영국 석유회사의 국유화를 선언한 그는 이 조치로 「제2인자」의 위치를 굳히면서 79년 하산ㆍ알바크르 대통령이 사망하자 42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총리ㆍ군총사령관ㆍ혁명위원회위원장ㆍ바트당총재직까지 겸임한 후세인은 종신대통령으로서 이라크­이란간에 지난 75년 체결된 양국 수로협정이 불평등 하다며 이란을 공격,중동역사상 가장 긴 8년간의 전쟁을 벌였다.

이처럼 표면에 드러난 후세인의 전력은 무엇보다도 권력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정신분석학자들에 따르면 후세인의 어린시절은 소상하게 밝혀진 바 없지만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있어 항상 자기자신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숙부의 딸인 조카 사기다ㆍ카이라라와 25년전 결혼한 후세인은 슬하에 5명의 자녀가 있는데 막내를 무릎에 앉힌 채 시가를 물고 웃는 모습의 사진을 찍기 좋아하며,농부들과 밀을 경작하거나 사원에서 기도하는 모습 등 아버지와 같은 지도자의 이미지를 TV에 방영하도록 명령하곤 한다.

따라서 그는 아랍세계에서 아버지와 같은 지도자이면서 자신을 과거 메소포타미아의 위대한 왕들인 바빌론의 함무라비나 느브갓네살 등과 비교하기를 즐긴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을 공격해 70년간 점령했던 느브갓네살왕은 후세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구약성서 다나엘에도 기록돼 있다.

다나엘성서에는 느브갓네살이 마침내 쫓겨나 소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쓰여있으나 후세인이 이같은 전철을 밟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그의 권력욕이나 야욕은 아랍을 또다른 세계의 강국으로 만들려는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75년 이라크주재 각국대사들과의 회담에서 『우리는 투쟁의 궁극적 종착역이 결코 이라크의 땅에서 끝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투쟁의 목표는 앞으로 모든 아랍지역까지 확대될 것』이라고 포부의 일단을 밝히기도 했다.

후세인은 그후 5년뒤 자신을 제거하려던 쿠데타를 진압하고 『이라크는 제국주의자들을 분쇄하고 아랍이 전세계에 새 강국임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뱉은 말을 곧 실천에 옮기는 행동가이기도 한데 그의 행동에는 잔혹성이 배어 있어 정적이나 아랍의 다른 지도부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그는 이집트망명시절 야당이 집권당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나라면 차라리 총을 쏴서 제거하겠다』고 서슴없이 말하는가 하면 79년 대통령취임때는 전임각료 20명을 처형하기도 했다.

7차례의 쿠데타기도 역시 완전분쇄한 후세인은 철저하게 보복을 했으며 88년에는 이라크인구의 1%에 해당하는 쿠르드족 주민들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라크에서는 허가없이 타자기를 갖는 것도 죄가 되며 후세인의 얼굴이 실린 신문에 커피를 흘리면 불경죄에 해당돼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

심지어 도처에는 비밀경찰이 깔려 있고 이들 뒤에는 이를 감시하는 또다른 비밀경찰이 있다고 한다.

이라크의 형무소에는 얼마나 많은 수의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앰네스티인터내셔널등 인권기관에서는 무수한 인권침해 사례를 발표하고 있는 실정이다.

후세인의 잔인성을 놓고 이스라엘의 필적학자들은 후세인이 쓴 문체를 분석한 결과 그가 정신질환을 지닌 편집광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한 영국 외교관은 『그는 결코 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절제하면서 철저한 계산을 하는 전략가』라고 진단한다.

이말에 일리가 있는 것은 이번 쿠웨이트침공의 전격성이라든지 사우디침공을 위협하면서 쿠웨이트를 합병하는 전략의 탁월함을 보면 수긍이 간다.

미국의 한 군사전략가도 『후세인은 독일의 롬멜처럼 사막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그의 탁월한 전략을 찬양하고 있다.

후세인 역시 자신이 뛰어난 전략가임을 과시하듯 군복을 입고 베레모를 쓴 채 가슴에는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이번 쿠웨이트침공 전략에서 보인 허점으로서는 쿠웨이트에 진정한 친이라크 정권을 세우지 못했다는 점과 아랍의 반미강경파들을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서방을 비롯한 전세계의 규탄속에서 후세인은 고립돼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일부 아랍인들은 오히려 부패한 쿠웨이트왕정을 무너드드린 쾌거를 환영하는 분위기이며 팔레스타인인들은 후세인을 「약하고 굴종받는 자들의 위대한 희망」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이라크인들도 후세인만이 전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라고 믿고 있다. 어쨌든 후세인은 동서간의 냉전종식 후 첫번째 「침략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임에는 틀림없다.<이장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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