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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개인외교」로 이라크견제망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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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개인외교」로 이라크견제망 구축

입력
1990.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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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바탕 중동ㆍ소ㆍ중ㆍ일ㆍEC제국 설득/6일간 20여국 국가원수와 직접 통화이라크와의 전쟁위험 수위가 높아가는데도 불구하고 10일 향리인 메인주로 25일 동안의 장기 하기휴가를 떠난 부시 미 대통령은 반가운 휴가선물을 받았다.

이날 카이로에서 열린 아랍연맹 정상회담에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철군 ▲쿠웨이트 왕정의 복귀 ▲사우디­쿠웨이트 국경에 배치될 범아랍평화유지군의 창설등 7개항의 결의안이 채택된 것이다.

이 결의안은 회의 참가 20개국ㆍ1개기구중 이집트ㆍ시리아ㆍ아랍에미리트 등 12개국이 찬성했고 이라크ㆍ리비아ㆍ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등 2개국 1개기구만이 반대,나머지 알제리ㆍ예멘ㆍ튀니지 등 5개국은 기권,불참 유보 등을 표명했다. 사담ㆍ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범아랍민족의 성전을 호소했다. 그는 아랍세계에서의 카리스마적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소수임이 확인됐다.

반이라크 아랍평화유지군 창설은 파병 및 지상군의 보장을 위해 지상군 파병을 호소해 왔던 부시 대통령에게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백만의 원군」인 셈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 『적절한 때의 적절한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을 향리 케네벙크포트(메인주)로 초청하고 싶을는지 모른다.

물론 무바라크는 후세인을 견제,제동을 가하는 것이 이집트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 그가 후세인에의 도전에 앞장선 것은 이러한 실리적인 입장 때문이었지만 부시와의 개인적으로 가까운 관계가 문제의 신속한 처리에 작용했을 것은 확실하다. 부시 미대통령이 이라크 대통령 후세인을 쿠웨이트 침공 1주일 남짓한 사이에 지금처럼 고립무원의 궁지에 몰아 넣은 것은 그의 외교의 공로로 평가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30년 지기인 니콜라스ㆍ브래디 재무장관은 『개인외교,즉 부시 대통령이 취임 이후 또는 그 이전부터 모든 세계지도자들을 알기 위해 보낸 그 여분의 시간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정말 효과가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당초에는 『군사개입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등 다소 부드러운 반응을 보였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전격 점령한 2일 그는 백악관서 의외의 이 연성논평을 남겨 놓고는 대처 영 총리를 만나기 위해 콜로라도주 아스펜으로 날아갔다.

부시 대통령은 대처 총리로부터 『후세인이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 자신 이러한 우려를 갖고 있던차에 3일 아침 백악관에서 안보보좌관들과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과 사우디아라비아 침공 가능성에 대한 정보보고를 검토한 뒤 확신을 갖게 됐다.

부시 대통령은 4일 아침 캠프데이비드 산장에서 외교 및 군사보좌관들과 전략회의를 갖고 사우디가 이라크 대통령 후세인의 침략을 막으려면 미국의 지원이 필요하고 미국은 상당한 군사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 결론을 내리자 그의 특유의 전화 정상외교를 서둘렀다. 당사자인 사우디의 파드왕과 다른 아랍지도자들은 후세인이 사우디를 위협하리라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4일 하오 1시 사우디의 파드왕에게 전화,후세인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이에 대해 지원해 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부시 대통령은 파드왕에게 직접 호소하는등 수십차례 통화를 했지만 아랍 지도자들에게 그들끼리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는데 2일 이상이 걸렸다. 그는 또한 유엔을 통해서 이라크의 침략행위를 제재키로 하고 유엔 안보리에서 대이라크 규탄 결의안,제재결의안,쿠웨이트합병 무효결의안 등을 의결토록 했다. 여기에서의 열쇠는 소련과 중국이 잡고 있었다.

부시는 소련과의 냉전 이후의 새로운 협력관계를 이용,소련의 동조를 얻어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쿠웨이트는 미ㆍ소 사이에 줄타기 외교를 해왔던 관계로 소련이 스스로 이라크규탄에 나섰던 것. 부시 대통령은 제임스ㆍ베이커 국무장관을 재차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과 협의토록해 전후 최초로 미ㆍ소 공동규탄 성명을 내는 이례적인 제스처까지 동원했다. 중국으로서도 부시 대통령의 배려에 답례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는 또한 영국이외에 프랑스ㆍ캐나다ㆍ이탈리아ㆍ터키ㆍ벨기에ㆍ스페인ㆍ서독 등 나토 동맹국들과 일본의 정상에게도 직접전화,금수와 경제봉쇄 등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일본은 중동원유 의존도가 높아 석유수입 금지는 경제적 희생이 불가피한 입장이다. 그러나 이라크를 경제적으로 교살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EC의 참여가 필요하다. 부시 대통령은 가이후(해부) 일 총리와 직접통화,동의를 얻어 냈다. 부시와 가이후도 『론ㆍ야스』(레이건 전 대통령과 나카소네 전 총리)의 관계처럼 친교가 생성됐다. 부시 대통령은 과거의 실패가 재연되지 않도록 확답을 받아 냈다.

부시 행정부는 외교 및 경제제재(엠바고 및 해상봉쇄) 군사개입 등 3개 대응책을 세워 놓고 이를 다국적으로 추진키로 했다.

부시는 대유엔,대나토,대중동,대아시아 지역등에 대한 외교포석을 머리에 그려 놓고 있었다고 워싱턴 포스트지는 설명하고 있다. 말린ㆍ피츠워터 백악관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은 1,2시간에 한사람꼴로 세계 지도자에게 전화 했으며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6일 동안에 20개국 이상의 국가원수들과 직접 통화했다』고 밝히고 있다.

거의 정신없을 정도로 전화를 해대고 정책결정의 모든 면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 그의 위기관리방식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는 다국적 지상지원군의 조직에 당초 구상했던 나토의 동원에는 실패했으나 온건 아랍국들의 참여만은 성공한 셈이다. 해ㆍ공군에서는 영국ㆍ프랑스ㆍ캐나다ㆍ오스트레일리아ㆍ소련 등이 참여,구색을 그런대로 갖추었다.

이라크 저지,바꿔 말해서 중동원유의 원활한 유통보장(카터독트린)에 지상군 파병등 군사력을 동원한 것은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정치생명과 미국의 국위를 건 위험스러운 대결단이다. 그는 국제정치여건의 변화와 정상들과의 친교에 바탕을 둔 개인외교로써 대이라크 고립화에 조정자역할을 한다. 지금까지는 결과가 좋았다. 그는 미국이 변화된 시대에 세계를 이끌어가는데 필요한 지도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워싱턴=이재승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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