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쿠데타가담 79년에 대권… 앞날 암운『이라크는 「생활수단을 없애는 것 보다는 목을 베어버리는 편이 훨씬 낫다」라는 아랍의 속담을 잘 알고 있다. 신이여,우리가 저들에게 미리 경고했음을 증거하소서』
쿼타를 초과한 석유증산문제로 쿠웨이트와 한창 긴장을 빚고 있을 당시 이라크의 사담ㆍ후세인 대통령(53)이 내뱉은 이 말은 2일 이라크군의 전격적인 쿠웨이트침공을 암시하고 있었다.
지난 7월17일 후세인대통령이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에 대해 원유과잉 생산으로 이라크에 1백40억달러의 손실을 입혔다고 비난의 포문을 열었을때만 해도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침공이라는 오늘의 사태를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후세인의 속셈은 원유값을 올리고 이란이라크전쟁 당시 쿠웨이트로부터 빌린 1백억달러의 차관을 탕감받으려는데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때문에 OPEC회담에서 「유가인상ㆍ쿼타준수」라는 이라크의 요구가 관철됐을때 긴장이 사라질 것으로 본것이 세계의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그러나 아랍의 맹주를 꿈꾸는 후세인의 계산은 보다 「원대」했음이 이번 침공으로 드러났다.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보호국화하여 그가 국내외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려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야심의 실현을 위해 이란이라크전 종전직후부터 주도 면밀한 준비를 진행시켜 왔던것으로 보인다. 이란이 종전직후부터 군대를 감축해 왔음에 비해 후세인은 8백억달러에 달하는 외채를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백만명이나 되는 군대를 계속 유지했다.
게다가 군비를 확장하고 있음을 공공연히 과시했다. 지난 3월 미제핵무기기폭장치의 밀반입을 시도했는가하면 4월에는 중동전역을 사정거리로하는 전장 40m의 슈퍼대포의 부품을 도입하려는 문제로 말썽을 빚기도 했다.
화학탄을 자체개발했다고 공식발표하면서 이스라엘이 공격할 경우 화학탄으로 보복,이스라엘 전국토의 절반을 초토화하겠다고 호언했다. 후세인은 지난 5월 아랍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바그다드에 모인 아랍지도자들에게 이라크의 군사력을 과시,자신의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님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주변국들에 겁을 주었다.
쿠웨이트와 의도적인 긴장관계를 조성했을때 사우디아라비아등 인근국가들이 보여준 태도는 후세인에게 「실력행사」라는 도박을 감행할 「적기」라는 확신을 갖게했다. 쿠웨이트를 후원해야할 사우디가 이라크를 달래고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주변국들이 이라크의 무력을 겁내고 있음을 확인한 후세인은 쿠웨이트와의 협상결렬을 빌미로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한 것으로 분석된다.
79년부터 11년째 집권중인 후세인은 바그다드대와 카이로대를 졸업했으며 57년 바트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59년 카셈정권에 의해 대통령 암살음모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집트에 망명했던 그는 63년 귀국할 수 있었으나 다음해인 64년 알레프정권 전복음모로 또다시 체포된다. 65년 옥중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66년 바트당 지도부 부서기장에 임명됐고 68년 바트당주도의 쿠데타에 참가했다. 69년부터 혁명평의회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79년 7월 대통령에 임명돼 오늘에 이르렀다. 80년 이란을 침공,8년간 전쟁을 수행하면서 인근 아랍국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그는 이때 구축한 막강한 무력을 바탕으로 급기야 형제국에 총부리를 겨눈 것이다.
그는 쿠웨이트에 친이라크 괴뢰정권을 세우고 양국간의 현안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매듭지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질서 및 아랍국가들간의 질서를 교란한 그에게 닥쳐올 범세계적인 「응징의 움직임」을 그가 지금까지처럼 「영리하고 교활하게」처리해 나갈지는 극히 비관적이다.<유동희기자>유동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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